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6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27편 접수됐다. 이중 최유리씨의 ‘우리 집에 DJ가 산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20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20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일곱번째는 가작 수상작인 임세연 씨의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이다.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

임세연

잊을 수 없는 그날은 엄마와 아빠가 오랜만에 즐거운 호주여행을 함께 떠난 날이었다. 아빠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화로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별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냥 여행 중에 잠깐 다리를 삐었거나 넘어진 거겠지 싶었다. 그런데 호주에서 건너온 엄마의 음색을 듣는 순간 큰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전화 속 엄마의 목소리는 지칠 대로 지친 음색이었고, 말보다는 거칠게 토해내던 울음이 대부분이었다. 호주에서 아빠가 뇌출혈을 일으켰고, 현지병원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엄마는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병원에서 제공해 준 빵을 먹고, 통역사를 통해 겨우 버티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일단 치료를 위해 호주에서 아빠를 데려와야 했는데, 호주에서 한국으로 환자를 데려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행사에서는 여행 중에 쓰러진 아빠를 모른 척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버렸고, 홀로 엄마는 호주 병원에 남았고, 누워있는 아빠를 보며 매일매일 오열했다. 다행스럽게도 아빠의 회사 동료분들의 도움으로 한국병원으로 올 수 있었다. 나는 한국에 도착했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바로 병원으로 갔고, 그제서야 아빠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도착했던 한국병원에서도 쓰러져있는 환자를 복도에 방치하는 등 불친절이 말이 아니었다. 무례한 레지던트나 간호사, 의사의 언행에 또 한 번 마음이 긁혔다.

예상은 했지만 예전의 그 호기롭고 당당한 아빠의 모습이 아니었다. 여행코스 중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갑자기 뇌출혈이 일어났고 엄청나게 마셔댔던 술과 호흡기를 시커멓게 태우며 피워댔던 담배가 원인이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흐느끼는 아빠의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온몸을 감싼 붕대 사이로 언뜻 비치는 초췌한 얼굴을 보노라니, 그간의 괴로움이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호주에서 건너온 아빠를 봤을 당시에는 가망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말도 하지 못했고, 심하게 살이 빠져 온몸에 기력이란 기력은 모두 사라진 모습이었다. 그때부터 나와 엄마는 평일엔 일을 하고 주말엔 아빠를 돌보러 병원에 가는 생활을 5년 동안 반복해야만 했다. 똥오줌을 받아내기도 하고, 거칠고 무거운 병실 공기 속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순간순간 숨 막혔다. 이 모든 건 가족이기에, 가족이어서 열심히 노력했다.

병원 생활은 쉽지 않았다. 새벽에도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하는 아빠를 위해 잠을 거의 자지 못했고, 언어능력과 지적능력이 떨어져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짜증을 부리는 아빠와 같이 지내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지금도 아빠는 온몸을 구겨가며 걷는다. 그래서 지나가면 모두가 쳐다본다. 어기적거리는 데다 스스로 화가 나면 참지 않고 욕도 잘한다.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으면 툭툭 치면서 고집부리며 걷는다. 그때마다 나는 솔직히 너무 창피하고, 속상했다. 그래서 같이 걸을 때면 일부러 멀리 떨어져 걷기도 하고, 아는 사람이 알아볼까 봐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남모를 그늘이 들킬까 봐 일부러 더 밝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웃고 다녔다.

밝고 긍정적인 모습의 이면인 나의 어둡고 힘든 면을 남에게 꺼내 보여준다면, 사람들이 떠날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실제로 아빠의 상황이 급변하자, 엄마와 아빠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떠났다. 더 이상 좋아지지 않을 테니 포기하고 놀러 다니라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아픈 사람은 병원으로 보내고 남은 가족끼리는 행복을 찾으라는 말을 아빠 옆에서 하기도 했다. 재활치료를 하는 곳의 재활 치료사는 나에게 아빠에게 괜한 희망을 주는 말을 하지 말하고도 했다. 아프니까 부부동반 모임에서도 빼야 하지 않겠냐며 대놓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마음 아픈 일이었다. 아빠가 아프기 전에는 어떻게든 어울리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 냉정하고 차갑게 돌아서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래서 내 주변도 저럴까 봐 너무 겁이 났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아닌 척 연출된 모습만을 보여줄 순 없었다. 환자를 돌보는 일은 힘에 부쳤고, 감정적으로도 나약해지는 때가 많았고, 나는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한 순간부터 마음에 병이 생겼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친한 언니에게 아빠가 아프고 나서 겪게 된 모든 감정과 상황을 눈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내가 그토록 숨기고 싶고, 알리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터놓자 나에게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그냥 나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다시금 차분한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고, 진심으로 나를 대해준 사람들의 위로를 통해 더 이상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아빠의 이야기를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내가 힘들었던 시기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몇몇 친구들은 떠나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 남의 시선과 관계에 너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달라지는 상황은 내가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보다 나는 내 마음을 돌보기로 했다. 나는 다시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고, 나 자신을 위해 운동도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에 대해 열심히 탐구하기 시작했다. 만약 아빠가 아프지 않았다면, 남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아빠 옆에서 함께하면서,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나 청소년기의 아빠가 어떤 생각을 가지며 살아왔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친구에게 골탕을 먹은 이야기부터, 시골에 사셨던 아빠가 영어를 처음 선생님께 배웠을 때의 놀라움. 그리고 벌에 쏘여서 머리가 퉁퉁 부었던 즐거운 에피소드 등 30년 넘게 아빠와 함께 살아왔지만, 모두 처음 알게 된 것들이었다. 물론 아빠가 아플 때의 대화는 의사소통보다는 본인의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연설에 가까웠지만, 오히려 서로에게 고달픈 시기를 보내고 나서야 나는 아빠를 진정한 가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와 내가 힘들다는 것만 생각한 나머지, 정작 가장 아픈 아빠를 등한시하고 미워했던 나를 반성했다. 그러고 나니 아빠의 일그러진 모습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장 고통스러웠을 텐데, 내가 가장 미워한 사람이 되어버린 아빠.

나를 에워싼 상황은 내가 조절할 수 없지만, 그 상황 속의 내가 어떤 심지를 지니고 살아갈지는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연약해진 순간과 수 리터의 눈물이 더해져, 마음의 근육은 단단해졌고, 살아가는 힘은 튼튼해졌다. 모든 것들이 아빠가 아프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었고, 알게 된 것들이다.

아까 아빠에게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걷는 모습을 보고 오늘도 아이들이 로봇이라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웃으며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오늘처럼 내일도 아빠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