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보건복지부, 국민일보, 에이블뉴스, MBC나눔의 후원으로 ‘제 4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393편 접수됐다. 이중 이영순씨의 ‘기적’이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8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5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 한 번째는 가작 수상작인 손은석 씨의 ‘네겐 너무 높은 10cm’이다.

네겐 너무 높은 10cm

손은석

“아... 여기도 이런 거야?” 모처럼 밥을 먹으러 나온 날, 승언이와 나는 이날도 여전히 30분을 헤매야 했다.

승언이는 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친구다. 그래서 130kg가 넘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나와 승언이는 같은 과 동기로, 수업 시간 필기도우미를 맡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우리는 종종 만나 밥을 함께 먹을 정도로 친해졌다.

간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학교 주변 식당에 나왔다. 그러나 승언이가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고작 ‘10cm’ 때문이다. 이 식당 앞에도 저 식당 앞에도 모두 10cm의 턱이 있다. 일반인들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대부분의 건물 입구 앞에는 조그만 턱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넘어 가면 되지 뭘 그래?”라고 할지 모르지만, 130kg의 전동 휠체어는 맘처럼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 승언이에게 10cm는 넘지 못하는 가장 작은 산이다.

식사 장소를 찾으러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어느 식당은 건물 진입로에 경사로는 없는데 건물 안에 엘리베이터는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엘리베이터가 만들어진 것일까? 그저 다수의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30분이 넘게 식당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아 간 곳은 또 다시 그곳. 저번에 갔던 그 식당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식당을 찾았지만, 사장님은 승언이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또 왔냐며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신다. 그곳에서 ‘돼지 불백’을 몇 번 먹었는 지 세는 것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다. 음식은 물릴 때가 되었는 지 모르지만, 그래도 올 때마다 치즈 계란말이를 챙겨주시는 사장님의 정은 물리지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함께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10분 이상 걸어가야 한다. 승언이가 맘 놓고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은 이 근방에서 단 한 곳뿐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달려 도착한 카페에서 우리는 소소하지만 소중한 티타임을 가졌다. 저녁을 먹기 위한 승언이의 험난한 여정은 참 힘들었다. 일반인인 나도 지칠 정도로...

하지만 승언이에게는 넘어야할 산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에서는 수업을 들을 수 없고, 몇 개 되지 않는 장애인용 버스를 타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학교에 오려면 경사로를 찾아 한참 길을 돌아야 하고, 볼일을 보기 위해선 장애인용 화장실을 찾아야만 한다. 저녁 식사와의 사투를 방금 막 끝낸 승언이는 그렇게 또 세상과의 사투를 준비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걸어본다. 한쪽 팔을 쓰지 않고 옷을 입어본다. 한 발로 계단을 올라가 본다. 시도해본다. 그러나 금새 이기지 못하고 포기한다. 이 실험을 통해 나는 매우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동시에 내 친구 승언이와 장애인분들에게 존경심, 아니 경외심마저 품게 된다.

사실 우리는 조금의 불편함도 이겨내지 못하고 더 편리하고 편한 방법을 찾는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집 앞 가로등이 나가 너무 불편하다며 바로 구청에 민원을 넣었다. 수리중인 지하철역의 에스컬레이터를 보고, 금새 짜증을 내며 계단을 올라갔다. 볼 수 있음에, 걸을 수 있음에, 건강히 살아있음에 감사할 줄 몰랐다.

‘역지사지’, 다른 사람의 처지를 헤아려 생각해본다는 뜻을 가진 유명한 사자성어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이 마음을 품었을까? 한 번이라도 제대로 품었더라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오늘 난, 그들의 처지가 되어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의 삶에 공감할 수 있었다.

사회의 ‘소수’는 ‘다수’에게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수’에게 인정받는, ‘다수’가 이해할 수 있는 ‘다수 속의 소수’가 되고 싶어 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은 누구보다도 다수인 우리를 필요로 한다.

우리와 함께, 우리와 동일하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 우리가 그들을 품어주고, 인정하고, 존중해줄 수는 없을까? 그것은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을 이해해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들과 일상을 함께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마침내 그 도착점은 더 행복한 사회일 것이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