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원 사무실에서 이정만씨. <이복남 기자>

"운명아 길을 비켜라, 내가 나간다." 독일의 철혈 제상 비스마르크는 운명에게 길을 비키라며 운명을 개척해 나간 사람이다. 운명은 자기가 선택하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이 마치 남의 손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남의 손에 달려 있는 운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 운명을 알려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예전에도 많았고 21세기인 현재에도 여전히 성행한다.

한때 미신이라며 저만치 밀려났던 사주 역학 등이 인터넷이라는 최첨단 기기를 앞세워 득세하는 것도 아이러니다. 그러나 여전히 50년 혹은 100년전의 옛방식으로 사람들의 길흉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

이정만(58세)씨 그는 경남 양산군 상북면 상삼리에서 아버지 이진용과 어머니 박분악 사이에서 7남매의 여섯째로 태어났다. 잘 먹고 잘 싸고 온 동네를 헤집고 돌아다녀 우량아라고 했다.

집 뜰에는 감나무가 있었는데 그가 세살 나던 1949년 윤7월 어느 날 땅에 떨어진 홍시를 주어먹고 배탈이 났다. 설사병은 멈추지 않았고 며칠인가를 앓다가 일어났는데 눈에 백태가 끼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가난한 농사꾼이었고 의료기관을 이용할 엄두도 못 낸 채 한약이나 조약에 의지하였다.

"나시래이(냉이) 뿌래이를 삶아서 그 물에 눈을 찜질도 하고 뱀이 상레(헐레) 물을 구해다가 꼬채이에 소캐(솜)를 감아 그 물을 찍어서 눈에 바른 기억은 납니다." 대여섯살까지 그런 약들을 먹고 바르고 했으나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런데 상삼리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어릴 때 이정만씨의 옆집에 살았다는 친구 A씨의 말이다. "집 뒤에는 대밭이 있었는데 한날 밤 억수로 비가 내렸고 그 대밭에서 밤새도록 야시가 울었습니다."

오우우우~~ 밤새도록 울어대는 여우 울음소리에 사람들은 불길함을 느꼈다는데. "아침에 이 친구(이정만씨) 아버지가 똥장군을 지고 논에 갈라꼬 나와보니 축담에 커다란 야시 한마리가 척 엎드려 죽어 있더랍니다." 동네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이정만씨의 부친은 불길하다며 산에 갖다 묻자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약이 된다며 탐을 냈다.

그러다가 B씨가 그 죽은 여우를 가져갔는데 당시 A씨 어머니가 병이 들어 앓아 누워 있었는데 A씨 아버지가 B씨에게 여우를 사서 마누라에게 삶아 먹였다. A씨의 어머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나 A씨 위로 형들이 죽고 집안은 몰락했고 B씨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정만씨는 눈이 멀었고 24살 큰형이 죽었다. 동네사람들은 여우와 관련 된 세집이 모두 화(禍)를 입었다고 믿고 있었다.

어쨌거나 장대 같은 큰아들을 잃고 막내아들은 눈먼 봉사가 되었으니 그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하였으랴 "어머니가 많이 울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고향 상삼리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시각장애인 한사람이 있었는데 역리학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 맹인 친구와 담소를 나누던 중 친구 왈 '아들도 공부를 시켜야 먹고 살 것 아닌가?'

그때부터 그 선생에게 공부를 배우기 시작했다. 윤수달 선생은 을사생(1905)인데 필자가 처음 이정만씨를 찾아갔던 날(음력 7월 25일)이 윤수달 스승님의 제삿날이라고 했다. 선생은 30년전에 돌아 가셨지만 제삿날은 한번도 빠진 적이 없다며 저녁에 가야 한다기에 다음 날을 기약하고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일곱살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윤수달 선생을 만났는데 공부는 육갑부터 시작하였다. 첫날 '갑자을축' 네자를 배웠다. 다음날은 갑옷 甲, 아들 子, 새 乙, 소 畜을 배웠고 그 다음 날은 해중금(海中金)을 배웠다. 이렇게 갑자을축 해중금 일곱자를 배우는데 사흘이 걸렸다. 갑자을축 네자를 가르쳐 주면 하루종일 갑자을축을 외워서 머리속에 입력 시켜야 했다.

그 다음에는 병인정묘 노중화를 또 그런식으로 배워 나갔다. 갑자을축 해중금 병인정묘 노중화, 무진기사 대림목...이렇게 육십갑자를 다 배운 뒤에 육효와 사주를 배우고 천수경과 옥추경 등을 차례로 배워 나갔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데려다 주었으나 두살 아래 여동생이 서너살이 되면서부터 여동생이 오빠의 길잡이가 되었다. 선생 집은 제법 멀어서 여동생이 오빠 손을 잡고 골목골목을 돌아 선생집에 데려다 주고 데려 오곤 했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마다리를 뒤집어쓰고 다녔다.

열두살 때 동네 구장이 와서 맹학교를 보내라고 했지만 부모님은 배우던 공부(역리학)를 계속 배워야 한다며 맹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이정만씨의 삶은 ②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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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누구나기자로 현재 하사가장애인상담넷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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