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을 떠나는 신필균 이사장은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었다며 사직 이유와 정계 진출의 변을 밝혔다. <에이블뉴스>

공단 떠나는 신필균 이사장 특별인터뷰

신필균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장이 지난 13일 갑자기 사직서를 제출한 이후 10일이 지난 22일 사표가 수리되고 오늘(23일) 오후 4시 이임식이 예정되어 있다.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흥분한 신 이사장은 다음날 아침 열린우리당을 찾았다고 한다. 이미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를 신청했던 신이사장은 당으로부터 앞으로 정치적 보장을 받지 못했지만 백의종군하는 심정으로 어느 직에서든지 혼신을 다할 생각을 전했다고 말했다.

특히 장애인 대표 몫으로 할당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와 관련 신이사장은 “나를 장애인 대표로 뽑아달라는 말을 해 본적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며 잘라 말하고 “하지만 국회에 진출한다면 장애인복지와 관련한 일을 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공단의 변화를 사실상 주도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 가동하려는 순간 공단을 떠나는 신이사장을 지난 15일 오후 7시 자택에서 만났다.

- 이사장님께서 사직서를 제출하셨다고 들었다. 언제 제출하셨는지?

= 지난 3월 13일 토요일 노동부장관께 제출했다.

- 신이사장께서 열린우리당에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하신 이후 장애인계에서는 이사장님의 거취 문제가 관심사였다. 호사가들은 이사장님 거취와 관련한 최종결정을 20일쯤으로 예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갑자기 서둘러 사직서를 제출하시게 된 배경은?

= 열린우리당에 비례대표 공천 신청을 했을때만 해도 굉장히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마음속으로 공천은 언제든지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공단 이사장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 부담이었지만 다행히 공단이 법률적으로 선거법상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제약을 받지 않는 범주에 들어가서 행동으로만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고 의사표시만 해도 되는 범주였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대처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난 12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 가결이 된 이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밥을 먹지도 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한 체 뜬눈으로 날을 세다 13일 아침에 열린우리당에 합류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당에서는 앞으로 나의 미래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고 나 또한 그런 보상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답변을 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합류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노동부 장관께 사직서를 제출하고 신속하게 처리해달라 요청까지 했다.

- 그럼 당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가 궁금한데 당과 의견이 조율됐나?

= 아직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고 의견을 조율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어쨌든 당에서는 적합한 직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며 조금 기다려달라고 했다. 내가 당을 방문했을 때는 당사를 옮긴 바로 다음날이라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그러나 지난 20일 열린 열린우리당에서 민생․경제특별본부의 고문역을 맡게 됐고 주로 민생관련 복지정책을 마련 할 것이라고 연락이 왔다고 신 이사장이 통보해 왔다.)

-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주저 없이 공단 이사장의 사직서를 제출하실 만큼 충격을 받으신 것 같은데 이번에 대통령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정치적으로 평가하신다면?

- 법률적으로 탄핵감 사유가 된다 안된다 이전에 대통령은 행정가이면서 정치가다. 성숙한 정책정당이 되려면 대통령도 자기가 속한 정당에 대한 발언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내각제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선진국가에서도 자연스러운 것이며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이 모두 그런 발언을 했다. 또 우선 정책이 발전을 하려면 의석이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아야 하고 논쟁이 벌어져야 민주주의가 발전을 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한 국회 의석형태는 여당이 절반을 약간 넘어가는 수준이 되어야 활기찬 민주적인 대의정치가 정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대통령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정치적 평가를 한다면 우선 한나라당의 경우 정통수구이며 한국현대사를 이끌어온 가장 비리와 부정부패가 깊숙이 들어있는 정당으로 평가하고 싶다. 물론 최근에 시대가 변하면서 한나라 의원들 중에서도 올바른 생각을 하는 분도 있고 또 과거에 민주화 운동을 했던 분과 노동운동을 하셨던 분들도 합류된 것은 사실이다.

정치문화와 정책발전을 위해서는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의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 그래야만 정책정당으로 발전 할 수 있다 또한 각 정당이 내놓는 입안 내용들은 그 이념과 철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 한나라당의 태도는 보수적인 철학에 의한 것이 아니라 흔히 말하는 당리당략에 의해서, 혹은 자기 방어적인 면에서 행동을 취했다. 정말로 반 민주적 행위로서 일부 소수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민주당은 노대통령이 감정적으로 좀 서운할지 모르겠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심리적으로는 이해하지만 그래도 민주당은 전통적인 야당의 민주세력을 끌어왔지 않느냐. 조금 밉고 섭섭하더라도 큰형님 같은 역할을 했으면 했다.

그런데 이렇게 민주주의를 짓밟는 것은 민주당의 전통적인 이념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신필균 이사장은 의회에 진출하게 된다면 보건복지위원회와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에이블뉴스>

- 열린우리당에 장애인 비례대표 공천신청을 하신 분들이 신이사장님을 포함한 5분이다. 모두다 훌륭하신 분들인데 신이사장께서 입당하심으로써 미묘한 파장이 흐르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정치계에 입후보하는데서 경쟁은 선의의 경쟁이다. 그런 차원에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페어플레이가 결과를 말해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나쁘다고 볼 수는 없고 적극적으로 본인을 소개하고 본인이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모두가 해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 이사장님께서는 혹시 열린우리당과 장애인계의 몫에 대한 교감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 여성계에서 나를 추천했지만 내가 속한 분과는 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바로 사회, 시민, 여성, 장애까지 포함하는 것 같다. 나는 사실 1960년대부터 시민운동과 사회운동, 사회복지정책을 담당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나 싶다.

여성도 여성운동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내가 여성계의 대표라는 것과는 약간 구별이 된다. 하지만 내가 장애인 대표냐 아니냐는 얘기는 달라진다. 장애인 정책을 얘기할 수는 있어도 나를 장애인 대표로 뽑아달라는 말을 해 본적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나는 국회에 들어가게 된다며 사회분야 시민운동가로서 민생분야, 복지정책 쪽에서 일을 하고 싶다.

- 그럼 국회에 상임위원회가 보건복지위원회와 환경노동위원회가 있는데 어느 쪽에서 일해보고 싶단 말인가?

= 보건복지위원회를 택할 것이다. 거기서 장애인 복지정책도 해야하고. 대신 환경노동위원회도 무시할 사안이 아닌데 보통 국회의원들 상임위는 두 개 정도 맡아서 일을 하는데 욕심 같아서는 두 개의 상임위를 겸하고 싶다. 환경노동위과 보건복지위나 완전 별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올 1월 초 '맑은정치 여성네트워크'에서 선정한 여성대표 102인에 선정되고 그 가운데서도 유력한 후보자로 각종 언론에 주목을 받아 왔다. 어떤 면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 가장 큰 특징은 내 경험이나 경력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여성운동가로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공무원도 했고 행정분야의 일도 해봤고 그러면서도 사회운동을 했던 면이 나를 여성운동가라기보다는 전문가로서 평가하게 했던 것 같다.

- 다양한 이사장님에 대한 이력을 우리 장애인계에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듯 싶다. 이 기회에 신이사장님에 대한 개인 프로필과 지금가지 활동 등을 소개한다면?

= 나는 학생운동은 대단히 일찍 시작했다. 그것은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화여대 재학중이던 시절 학교생활이 너무 무의미하다라고 생각했고 학생들의 대화의 이슈에 대해 회의가 있어서 1년을 휴학하고 혼자 산에 들어갔다.

그리고 복학해 몇몇 친구들과 의미 있는 대학생활을 하기 위해 '더 파워(The Power)'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1968년이었는데 이렇게 시작된 것이 내가 사회운동에 들어서는 시발점이 이었다.

처음 일곱 명이 조직을 규합,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하나는 주거운동이었다. 국유지에 오랫동안 정착했던 가난한 민중들이 강제철거를 당하고 있는 현장을 여학생 신분으로 찾아다니며 철거민들을 위해 깡패와 맞서기도 하고 법정 시위도 하면서 변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거운동은 우리나라 70년대 초반 심각한 철거문제가 도래되었을 때 우리조직은 그 운동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다른 하나는 노동운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노동운동 초기에 여학생들이 노동자로 위장을 하고 취업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전태일 분신사건이 맞이했고 이화여대 역사상 처음으로 시위에 참여하는 사태가 발생해 나는 학교에서 퇴학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졸업이후에도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총학생회 간사로 72년 말까지 활동을 했으며 다시 이화여대 대학원에 입학, 학생운동을 지속적으로 했다.

여학생 신분으로 왕성한 사회운동을 한 나는 당시 가장 진보정당인 통일사회당의 추천을 받아 73년 9월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떠나다 일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납치된 사건의 전말을 완전히 파악하고 스웨덴에서 공부가 아닌 운동가로 정착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74년에 기독교 대표 등 스웨덴 사회층지도자, 유명 일간지 신문기자들로 구성된 ‘South Korea Community’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한국민주화를 위한 스웨덴 운동단체를 조직한 것이다.

스웨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는 권위주위에 항거하는 운동이 전개되던 시대이었다. 독일과 불란서, 미주, 북미 등지에서 세계 기독교 민주동지회가 조직되었고 나는 북구 대표로 활약했다.

이처럼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남편(이종오 전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을 만났는데 나의 동기이자 동지이고 김성재 민주당선거기획단장(전 문화관광부장관) 박세일 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서경석 목사도 친구이며 동지들이다.

신필균 이시장은 지난 임기동안 장애인 고용의 시스템 기반을 구축하려고 노력했으며, 후임자가 현재 해 놓은 일을 밝고 올라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에이블뉴스>

- 스웨덴에서 사회복지 관련 일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일이었는가?

= 스웨덴의 특징이 중립국가로서의 민주주의와 사회복지가 가장 발달한 나라였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서 살면서 사회복지나 자유민주주의가 어떤 이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정의와 인권에서 나온다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정의와 인권을 정책적이고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이 민주주의고 이것을 정책적으로 프로그램화하는 것이 바로 사회복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학을 전공한 나는 스웨덴 사회보험청의 연구실에서 사회정책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를 하게 됐다. 오랜 기간동안 연구를 하면서 중도 장애인이 노동시장으로 복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직접 체험했고 재활의 중요성을 인식, 스웨덴 보건복지부가 재활법을 강화하는데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고 자부한다. 실제로 예산을 확보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정책을 만들었다는 것이 큰 보람이었다.

그러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눈을 떴다. 개인적인 자랑 같지만 이 분야의 자격증이 대단히 많다. SAS라는 프로그램에서 정말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스톡홀롬 광역시가 운영하는 데이터뱅크에서 일 했는가 하면 그후 의료보건을 담당하는 전문위원직을 맡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국민의 건강과 의료제도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제반 업무를 담당했다.

이렇게 스웨덴에서 약 22년을 살았다. 그러다 보니 한국사회와 격리되었다. 내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지난 95년도 말이었다.

- 장애인 고용촉진공단 이사장 직무를 맡으신 것이 약 20개월 남짓된 것 같다. 공단에 새로운 변화를 꾀하려 노력했던 것으로 안다. 특히 올해 이사장께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한 출발선상에 놓여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렇게 사직하게 되면 이사장께서 추진하시려고 했던 일들이 제동이 걸릴 염려는 없는지 아쉬움도 많을 것 같다.

= 우리 공단 직원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하다. 난 3년 임기동안 장애인 고용의 시스템기반을 구축하려고 왔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리고 후임자가 현재 해 놓은 일을 밟고 올라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그 누구도 바로 일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취업을 요구하는 장애인들이 노동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고용이 유지되는, 즉 일을 통해 생활이 열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변화가 요구되었고 그 일을 추진해 왔다. 물론 그 중에 몇 가지는 이미 장애인에게 직접적인 정책으로 내놓은 성과도 있었다.

장애인의 고용확대와 고용의 질 향상, 그리고 고용유지와 같은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일하는 방식을 바꾸게 됐고 올해부터 공단조직의 기구 자체의 기능과 역할을 이 세가지 프로그램에 맞춰서 바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범지역이 마련되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내가 부임한지 20개월 동안 미흡한 것도 많지만 지난해부터 일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어져 있음을 실감하곤 한다. 그래서 지금 공단이 추진하고 또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임직원이 옳다고 느끼고 특별히 다른방향으로 변화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해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그 뜻을 이해하고 있는 듯해서 마음이 놓인다.

사실, 지금 공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각의 지역사회의 취업을 원하는 모든 장애인을 우리의 고객으로 확보하여 관리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현재 고객관리를 위한 인력풀시스템을 구축하여 운영중이다.

계속 발전해 나가는 단계이지만 과학적으로 구축한 장애인 인력풀제는 단순노무직 뿐만 아니라 고급인력까지도 확보하고 장애유형별로도 인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교육부와 행정자치부와 연계하고 있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이 사회에서 장애인 복지의 기본과 기초를 다지는 일은 적극적으로 나서겠다 약속했고 그렇게 할 것이다.

- 이사장님은 어떻게 장애를 입었고 장애등록은 하셨는지?

= 나는 소아마비 장애로 5급을 판정 받았다. 보조기구에 의지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을 정도니까 아주 경미하다. 나도 사춘기 시절이나 어렸을 때는 중증 장애인만큼은 아니지만 소녀로서 마음 아파하고 속상해서 대부분 장애인들이 겪는 심정 고통을 겪어내야 했다.

내가 스웨덴에서 돌아와 장애인 등록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주변 장애인들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처음에는 이해를 하지 못했었다. 장애인등록을 한다는 것은 세금혜택이며 여러 서비스를 지원을 받게 되는데 내가 혜택을 받을 만큼 경제적으로 미약하지도 않고 내가 혜택을 받음으로서 정말로 받아야 할 장애인의 몫이 작아진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내가 스웨덴에서 배운 철학이었다. 그러나 내가 장애인 등록스티커를 차량에 부착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바로 등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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