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수로다리 옆 자신의 차 옆에 선 윤정화씨.

보통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위의 축복과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다. 사랑과 축복 속에서 재롱을 부리다가 나이가 들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성인이 되면 취업을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고 그렇게 늙어 간다. 생로병사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 가운데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그런데 윤정화(55살)씨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보통 사람들의 일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지리산 자락 함양군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남들은 태어남이 곧 축복이련만 그의 출생은 축복 받지 못하였다. 위로 형님 한 분과 누님 세 분이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재취였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태어나고 얼마 후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계셨으나, 사촌들도 다 한 집에 살았던 그곳에서 그는 늘 천덕꾸러기였다.

어린 시절 이웃에 사는 네 살이 많은 이종사촌형이 그를 잘 돌보아 주었다. 그가 네살나던 해 겨울, 이종형은 친구들과 뛰어 놀고 싶은데 그를 돌보아야 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동생을 업고 꽁꽁 얼어붙은 얼음판으로 나갔다. 당시 이종형도 겨우 여덟살이었으니 애가 애를 업은 꼴이었다. 포대기를 둘러 동생을 업기는 했으나 동생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줄줄 내려가는 아이와 포대기는 형의 엉덩이에 걸쳐 있었다. 그래도 형은 썰매타기에 열중했는데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형의 엉덩이 아래에는 제대로 먹지도 못해 가냘픈 네 살짜리 동생의 다리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아이는 자꾸만 칭얼대기 시작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느라 노심초사했으나 아이가 왜 보채는지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근처 약방에서 약도 사다 먹이고 한약방에서 첩약도 달여 먹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때 형이 얼음판에서 썰매 타다가 넘어졌다는 말만 해 주었어도 내 인생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에 아이의 오른쪽 다리 고관절부근이 부어 올랐다. 안에서 서서히 썩어 곪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전북의 00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없는 살림에 큰돈을 들여서 수술을 했건만 어찌된 것인지 수술의 효과는 없었다. 그는 고관절 뼈가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 건 잘못된 수술 때문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로부터 평생을 그는 그 오른쪽 다리와 씨름해야 했다. 어릴 때는 오른쪽 사타구니 또는 엉덩이에 몇 달에 한번씩 어른 주먹만하게 부어 올랐다. 그렇게 부어 올랐을 정도라면 그의 고통은 오죽했겠는가.

“그러다가 저절로 곪아터지면 다리고 바지고 온통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냇가에 가서 다리를 씻고 피고름이 범벅이 된 바지를 빨았다. 약도 없었고 그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 무렵부터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남편 없는 시집살이가 얼마나 고달팠던지 어머니가 집을 나가 버렸던 것이다.

혼자 고통을 참으며 고름이 터진 사타구니를 들여다보면 시뻘건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냇가에서 씻고 나서는 대바늘에 솜을 감아서 알코올로 닦아냈는데 대바늘이 한 뼘씩이나 들어갔습니다.” 손이 닿지 않는 엉덩이에 구멍이 났을 경우에는 그래도 죄 밑이 되었는지 이종사촌형이 닦아주기도 했단다.

그는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면서도 허구헌날 욕이나 얻어먹는 신세였는데 탈출의 기회가 왔다. 열서너살 무렵, 거창의 한 과자 공장에 들어갔던 것이다. 빵이며 과자며 배가 고파서 먹고, 맛본다고 먹고, 과자를 맘껏 먹을 수가 있어서 좋았다. 암빵 도넛 그밖에 여러 가지 과자들을 만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잡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때는 더없이 맛있었고 과자 먹는 재미에 열심히 일했다.

밤이면 일에 지쳐 골아 떨어졌어도 새벽이면 다리가 쑤시고 아파서 잠이 깨고는 했다. 주변에서 들은 풍월로 돈이 생기면 마이신이랑 이것저것 약을 사다 먹었다. 그 무렵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약을 달고 살게 되었다. 윤정화씨의 삶은 (2)편에 계속됩니다.

* 이 기사는 부산일보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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