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기씨와 김봉순씨 부부

그는 앞을 못 보니 처녀의 얼굴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처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선생 밑에서 철학을 배우면서 간간이 안택도 하러 다니고 해서 나음대로 모아 둔 돈이 좀 있었다.

어머니는 절대로 안된다고 반대를 하고 처가는 너무나 가난해서 무엇 하나 해 줄 형편이 못 된다고 했다. 그가 모아 둔 돈으로 범일동 천궁예식장에서 선생님 내외분과 작은댁 그리고 처가 식구들과 처녀가 식모살이하던 군인 가족들만 모여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자성대 부근에 방을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결혼을 하고 얼마 후에 그가 제법 돈을 잘 벌었음에도 착하고 알뜰한 색시가 자기도 벌겠다며 서면 어느 백화점에 점원으로 나갔다. 색시는 매일매일 돈을 받아 왔는데 어떤 날은 쌀 서너되 값이고 많은 날은 쌀 한말 값이나 되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300만원이 모아졌다. 색시가 친정에 한번 다녀오자고 했다. 친정이 워낙 못 사는 터라 장모 처남 처제 등 식구들 옷을 전부 한벌씩 사서 짐을 한보따리 이고 지고 시외버스를 타고 삼천포로 갔다. 장모는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쌀도 1가마 사 주고 먹을 것 입을 것을 잔뜩 사주니 장모는 자기 딸이 남의 집에 있는 것 보다 더 낫다며 좋아했다.

다시 부산으로 올라와서 그들 부부는 열심히 벌었다. 다음해 가을 색시가 임신을 했고 친정에 한번 다녀오고 싶어해서 돈을 많이 줘서 보냈다. 색시가 친정 가고 며칠 만인가 낯선 군인 하나가 찾아 왔다. 삼천포에 휴가 갔다가 올라오는 길인데 장복례가 많이 아프다며 좀 전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삼천포로 내려가 보니 가을인데 색시는 한이불을 뒤짚어 쓰고 있었다. 병원으로 데려가니 링게르를 꽂았는데 열이 더 심해져서 주사를 빼고 처가로 데려갔다. 새벽이 되자 색시는 더듬어 그의 손을 잡더니 '내가 아무래도 안되겠심더" 하더니 그것이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색시가 죽고 얼마동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정신이 없었다. 색시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술에서 취해 날이 가는지 오는지도 몰랐다. 어느 날 견디다 못해 영도다리에서 뛰어 내렸는데 마침 다리 밑을 지나가던 해경이 건져 주었다. 당시에는 영도다리에서 투신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해양결찰이 순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달이 지나고 마음이 좀 진정되자 혼자 지팡이를 더듬으며 삼천포로 갔다. 장모는 반가워하면서 장복례의 제사를 어찌할거냐고 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근처에 농지를 좀 사서 그곳에서 나오는 소출로 처가도 살고 제사도 지내기로 하였다.

색시가 이미 죽고 없으니 돈이 무슨 소용 있으랴. 있는 돈을 몽땅 털어서 동서금동 302번지에 땅을 쌌는데 2144평이었다. 잔금을 다 치르고 등기등본을 떼어서 평소 알고 지내던 남천동에 있는 정청용 변호사에게 보이니 잘 되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그의 인생은 될대로 되라였다. 이러는 그를 보고 어떤 사람이 중매를 했다. 충청도 여자였는데 알고보니 돈이 많다고 소문이 나 있어서 돈을 보고 왔는지 살림도 안하고 이것저것 트집만 잡더니 연년생 딸 둘을 낳고는 그가 때렸다며 130만원 위자료를 청구하였다. 기가 막혀서 어찌어찌 130만원을 마련해 주었고 딸 둘은 그녀가 데리고 갔는데 소문에 들으니 모두 다 죽었다고 했다.

그에게 여자 복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의 팔자 탓인지 또 새 여자를 만났는데 딸 하나를 두고 아들을 낳은 지 석달 만에 죽고 말았다. 갓난쟁이 아들은 그의 여동생이 몰래 남의 집에 주어 버렸다. 마산에서 결핵으로 죽은 딸은 세 번째 즉 이 부인의 딸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지금의 아내인 맹인 김봉순(60세)씨를 만났다. 김봉순씨는 서울 사람인데 앞 못 보는 맹인이라고 가족들의 구박이 심해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부산까지 오게 되었고 누가 돈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를 해서 왔는데 와서 보니 이미 거지더란다. 그래서 자신이 노래를 불러 연명하였단다. 그럼에도 그 땅을 팔지 않았던 것은 당시만 해도 땅값이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어쩌면 땅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 같았다.

김봉순씨와의 사이에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과 셋째 딸은 결혼을 했다. 큰아들과 막내아들과 네식구가 열한평 임대 아파트에 함께 살고 있는데 큰아들이 조금씩 벌어오는 돈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이제 김봉순씨도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길에서 노래도 못 부른다. 백종기씨는 고혈압에다 여러 가지 지병으로 숨이 차서 말하기도 어려웠고 더구나 이가 다 빠져서 말소리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러나 성년의 아들이 있어 국민기초생활 수급권자에서도 탈락되어 살길이 막연한 실정이다. 백종기씨와 김봉순씨는 필자에게 애원했다. 제발 삼천포 땅 좀 찾게 해달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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