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원씨는 부산 문현동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님이 공직에 계셔서 별 어려움 없이 자랐다. 언니 오빠들은 다 대학까지 나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면에 있는 결혼상담소에서 경리 일을 했다. 결혼상담소 일이 남자 여자 짝을 맺어주는 일인데 그렇게 맺어진 짝들이 잘사는지 못사는지는 상관없이 우선 성사 시켜주고 돈만 챙기는 것 같았다.

회의가 들었다. 어느 날 서면 부전예식장에서 화엄경 강좌가 있다는 포스터를 보고 부전예식장으로 찾아갔다. 화엄경은 부처와 보살과 중생이 하나되어 함께 성불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라는데 양산 통도사 스님들이 가르치고 있었다. 부처와 보살과 중생은 하나이고 '생명이 곧 진리'라는 말씀을 듣고 배워가면서 점점 불법에 빠져들었다. 그럴 즈음 '성철스님 3천배'가 유행처럼 떠돌아 다녔던 것이다.

다시 속세로 돌아와 보니 갈 곳이 없었다. 어찌어찌 하다가 예전에 근무했던 결혼상담실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 결혼상담실 일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달리 할 일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었다. 그동안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문현동에서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

서른 다섯 살의 여름,

어느 날 친구들과 해운대에 놀러갔다가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녁 무렵이었고 돌아오는 길은 길이 너무 막혀 차들이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창 밖을 내다보니 대연 고개 부근이라 다음 정류장인 문현동에서 내려야 하므로 출입구로 다가갔다. 정류장도 아닌데 버스 문이 열리더니 아주머니 한 분이 내렸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문이 열린 채로 버스는 출발했고 마침 문 앞에 서 있던 그녀는 그대로 퉁겨 나갔는데 옷이 문 어디 쯤에 걸렸던 것 같았다. 개문발차 교통사고였던 것이다.

며칠이 지났을까. '지원아 지원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하얀색 뿐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머니가 그녀의 뺨을 때리며 '지원아, 지원아' 안타깝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버스 뒷바퀴에 허리와 다리가 깔려서 수술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남에게 나쁜 짓 하지 않고 살았는데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업보를 받는 걸까. 억울하고 분했다. 정말 살고 싶지가 않았다. 어떻게 죽어야 하나. 병원 침대에 누워서 죽을 방법만 생각했다.

날마다 눈물로 지새우는 어머니 얼굴을 보니 차마 죽을 수도 없었다. 2년을 대학병원에서 지냈다. 그동안 허리 수술, 다리수술, 발 수술 등 수술을 8번이나 했다. 그럼에도 지체 1급 장애인이 되었다. 퇴원을 몇 달 앞두고 버스 회사에서는 보상금을 5천만원 주겠다고 했다. 큰오빠를 비롯하여 친척들은 5천만원 가지고는 안 된다며 소송을 제기하였다.

소송은 길고 지루했다. 6개월 간을 끌었는데 남는 것은 없었다. 변호사비를 비롯한 재판비용이며, 소송을 제기하면 그 때부터 병원비며 간병인비등 모든 것이 자부담이라는데 재판이 끝나고 그동안 들어 간 경비를 제하고 나니 2천만원이 남았던 것이다.

장애 그리고 여성이라는 멍에가 씌워졌다. 언제부터인가 이름이 사라졌다. 이름대신 장애인 그 여자이다.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병원 창구에서나 동사무소 장애인 명부뿐이다. 장애인 그 여자! 그것도 공식적인 곳에서나 그렇다.

언젠가 서울에서 조카 결혼식이 있었다. 가기 싫다는 사람을 언니와 조카들이 억지로 끌고 갔다. 누군가가 하는 소리. "저 병신을 말라꼬 데꼬 왔노?" 장애인은 친척 결혼식에도 참석하면 안 되는 병신이었던 것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면제를 사 모았다. 그러나 차마 먹지 못했다. 어머니, 굳이 변명을 하자면 어머니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는 백내장이 와서 앞이 보이지 않으신다고 했다. 어렵사리 돈을 마련해서 어머니 눈 수술을 했다. 눈이 조금 보이시자 어머니는 근처에서 빈병들을 주어 모으셨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시는 성품 때문이었다.

이지원씨의 삶은 (3)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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