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표정의 황기철씨.

장애인! 아무도 장애인이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은 없다. 누가 언제 어떻게 장애인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장애의 원인을 보면 가지가지이고 참으로 기가 막힌 사연도 많다.

뇌병변장애 2급 황기철씨의 장애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황기철(46살)씨는 부산에서 2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꿈은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20년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6.25 참전용사였다. 왼쪽 다리에 총상이 있었는데 늘상 그 상처 치료에 매달려야 했다. 총알은 왼쪽 다리의 종아리를 관통했는데 늘상 총구멍이 곪아서 진물이 흘렀다. 그럼에도 국가유공자 인정을 못 받았다.

아버지는 상처가 덧나면 여러 가지 민간약도 쓰고 주로 나환자 병원에서 약을 받아 왔다. 몇 달 치료를 하면 딱지가 앉았고 걸을만해서 보훈청에 가면 해당이 안 된다고 했고 돌아오면 얼마 후에 또 상처는 덧나고 그런 일을 반복하다보니 나중에는 포기를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만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더라면 학비 걱정은 안 해도 되련만 어머니가 메리야스 공장에 다니면서 벌어오는 돈으로는 살림은 언제나 쪼들렸다.

고등학교 무렵부터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돈 많이 버는 사장이 되고 싶었다. 언제나 쪼들리는 가난이 너무나 원망스럽고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생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되는 것이던가. 군대 갈 무렵 늑골에 이상이 있어 방위로 근무를 했다. 그 무렵 평생을 총상으로 고생만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총상이 덧났을 때 보훈청에 갔더라면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았을 것인데 아버지는 왜 항상 상처를 치료하고 갔는지 모르겠단다.

처음에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인문고등학교로 진학을 하였으나 대학은 갈 엄두도 못내었고 별다른 기술도 없고 이곳저곳 여러곳을 전전하다가 신발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김00(42)씨를 만나 84년에 결혼을 했고 딸(20살) 하나 아들(16살) 하나를 낳았다. 동생들도 출가를 했고 어머니는 혼자 사시면서 여전히 공장에 다니셨다. 의사가 못 되어도 사장이 아니어도 평화롭고 단란한 가정이었다. 아내도 그와는 다른 신발공장에 다녔는데 가난했지만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였다.

그런데 누가 황기철씨의 행복을 시샘이라도 한 것일까. 1991년 2월 14일. 그날은 섣달 그믐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회사에서 월급에다 보너스까지 두둑이 받았다. 밀린 외상값을 갚으려고 회사 동료 두명과 같이 근처 단골 술집을 찾았다. 술집에서는 외상값을 갚았다고 맥주 10병을 보너스로 주었다.

그 때 마침 직장 상사 한사람이 지나가면서 길 건너 호프집에 있을 테니 그리로 오라고 했다. 셋이서 맥주 10병을 비우고 길을 건너 호프집으로 갔다. 호프집에 들어가니 그 상사에게는 다른 손님이 있었는데 1000cc를 앞에 놓고 이야기 중이기에 그 자리에 앉아서 호프를 한잔 따라 마셨다. 그랬더니 그 상사가 허락도 없이 남의 술을 마셨다며 화를 냈다.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맥주 한잔 마셨다고 그러느냐. 더럽고 치사해서 니 술 안마신다."

그리고는 자리를 옮겨 카운터 앞에 자리를 잡고 호프를 시켰다. 술을 마시는데 술이 취했는지 어쨌는지 기분이 나빴다. 아무리 직장 상사라지만 술집에서 술 한잔 마셨다고 그 난리를 치다니.

(2)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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