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정신이 들자 그날밤 누군가가 뒤에서 잡아 당겼다는 것 밖에는 기억이 없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도 없었고 누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랬는지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경찰에서는 그 술집을 조사했고 병원에도 다녀갔다.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아픈 머리로 기억을 짜내 가면서 섣달 그믐날 밤에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이야기했다. 약간의 다툼이 있었던 상사는 아니라고 했고 가장 의심스러웠던 호프집 웨이터는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술집에서는 아르바이트였으므로 인적사항 하나 없다는 것이었다. 호프집에서도 자기들 책임은 없다고 했다. 치료비는 3천만이 넘었는데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그는 할일 없이 병원침대에 누워서 하늘만 쳐다보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내는 여전히 공장에 출근을 하면서 병원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는 친척 친구 등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치료비를 구걸해야 했다. 6개월만에 퇴원을 하였는데 왼쪽 수족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편마비였고, 장애2급을 판정 받았다.

아내는 억척같았다. 아들은 겨우 3살이라 어쩔 수가 없었고 큰딸은 사천 이모집으로 보냈다. 아내의 수입은 빚진 병원비 이자 갚기에도 부족했고 살길이 막연했다.

하는 수 없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사회복지 담당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동사무소 담당자는 해 주겠다며 아내의 급여명세서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3개월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 지쳐 구청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랬더니 금방 연락이 왔다. 당시 반송 3동에 백주사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도맡아서 처리해 주었다. 그 때부터 딸이 19살이 되어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수급자에서 탈락되는 작년까지 월 60만원 정도를 지원 받았다.

그리고 95년에 반송 도시개발공사 임대아파트에 178만원으로 입주를 하였다. 그 때도 백주사가 많이 도와주었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한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딸이 19살이 되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딸은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시골 이모집에서 제대로 학교도 못 다니고 겨우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지금은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다.

그럼에도 수급자에서 탈락되어 60만원의 지원비도 끊기고 임대아파트도 1년마다 재계약을 하는데 95년에 178만원으로 들어 왔고 다음해에는 196만원을 이었는데 작년에는 수급자에서 탈락되었다고 해서 125만원을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800만원이 될 때까지 임대료는 계속 인상될 것이란다.

올해부터는 그나마 동사무소의 배려로 공공근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왼쪽 수족을 전혀 쓸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앞에 장애물이 없어야 겨우 한 걸음씩 발을 뗄 수 있을 뿐인데. 여기저기 잔심부름이나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 억울합니다. 뺑소니 교통사고는 정부에서 얼마큼 지원해 주는 것 같은데 저처럼 억울하게 당한 사람에게는 정부에서 한푼 보상도 안 해주고, 딸이 18살이 넘었다고 수급자에서 탈락을 시키니 저는 어찌 살란 말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울분에 차 있다. 세상에 대한 적의를 그대로 들어낸다. 그러나 가족들을 생각하면 금방 풀이 죽는다.

"우리 어머니는 60이 넘었고 저 때문에 심장병까지 얻었는데 아직도 공장에 다닙니다. 집사람하고 아이들에게 고맙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란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죽고 싶은 심정이란다. 그러나 고생만 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차마 죽을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테레비를 보면 모두 도둑놈들 뿐인데 그렇게 억억 하는 돈, 우리같이 억울한 사람들 좀 도와주면 안됩니까?"

도와주면야 좋겠지요. 그러나 억단위로 상대하는 그들 눈에 피나게 살고 있는 우리네 삶이 어디 보이겠어요. 부디 딸과 아들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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