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현 사무국장이 25일 인터뷰를 통해 국민기초생활보장제의 현재 모습과 문제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에이블뉴스>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준) 김태현 사무국장 인터뷰

"열사가 돌아가시고 1주기가 다가왔습니다. 그 동안 정권이 바뀌었지만 민중들의 삶은 그대로입니다. 그렇다고 희망도 없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빈곤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던 김대중 정권의 생산적복지에서 나타났던 문제점들을 보완하는 수준의 참여복지라는 것을 내놓았습니다. 심히 우려가 되는 부분입니다."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준) 김태현(37·뇌병변1급) 사무국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복지기조인 참여복지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김대중 정권의 생산적 복지가 빈곤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정권유지를 위한 '사회안전망' 구실밖에 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그 틀을 유지하며 표면으로 드러난 문제점들만 수습하려는 참여복지에는 희망이 없다"고 역설하는 김 국장. 이러한 상황인식은 그가 오랜 운동 끝에서 얻어낸 결론이었다. 특히 고인의 고단했던 삶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자연스레 터득한 세상을 향한 시선이었다. 김 국장은 최옥란 열사보다 한 살이 어리며 12년 동안 누이동생으로 지내온 사이다.

최옥란 열사 1주기를 하루 앞둔 25일 오후 김 국장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건물에서 만났다. 최 국장은 '기본생활권 쟁취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현실화를 위한 연석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20여분을 기다려 최 국장과 향한 곳은 추모사업회가 지난해 6월부터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장애인실업자종합지원센터 사무실. 김 국장과 잠시 최옥란 열사의 발자취를 되짚어보고, 최옥란 열사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국민기초생활보장제의 현재 모습과 문제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일문일답.

-먼저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에 대해 소개를 해 주시죠. 추모사업회는 어떻게 꾸려지게 된 것인가요?

"최옥란 열사가 돌아가시고 나서 열사의 삶과 투쟁과 죽음이 억압받고 억울했던 모습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그냥 죽음으로서 한 개인의 삶으로 국한시키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많았습니다. 최옥란 열사는 장애인, 여성, 수급권자라는 사회의 모순이란 모순은 다 안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서 노들장애인야학, 장애인실업자종합지원센터, 민중복지연대,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 등에서 제안을 해서 추모사업회를 꾸리게 된 것입니다."

-최옥란 열사는 돌아가시기 전에 국기법 현실화 투쟁을 하며 유서를 쓴 적도 있습니다.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이러한 것들이 혹시 열사가 죽음을 준비해왔던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까? 열사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열사의 죽음을 정확하게 집단적 타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범인은 가깝게는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책임 전가는 아니겠지만 가장 큰 책임은 정치하는 사람들, 가진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사가 유서를 썼던 것은 죽음에 대한 준비라기보다는 그 만큼 열사의 생이 고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1년이 지났는데 주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열사는 어떻게 남아있을까요?

"그나마 살아 계신 때보다 돌아가시고 난 이후가 외롭지 않을 것이라 짐작을 합니다. 활동가들 중에서 열사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게시판에 추모시까지 보내주신 분도 있고, 지방의 한 네티즌은 1주기가 돌아오는데 기념식을 열어야하지 않느냐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현재 열사의 평전이 한 일간지기자에 의해 준비되고 있구요. 지난해에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사의 삶을 소재로 만화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1년 동안 장애인 운동계에는 어떠한 변화들이 있었나요?

"장애인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움직임이 활발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다.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운동이 그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거의 바뀐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잠시 열사에 대한 개인적인 회상을 해주신다면?

"전 남편하고 같이 살면서 임신을 했는데 임신중독증에 걸려서 손발이 통통 부어서 고생하시는 모습이 기억에 남네요. 무엇보다 가장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1년 12월에 있었던 명동성당앞 농성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니 열사는 참 억척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열사가 주요하게 펼쳤던 운동은 대해 잠시 회고를 해주신다면?

▲ 최옥란 열사가 생전에 투쟁하던 모습.

"살아 계셨을 때 투쟁에 열사는 장애인이동권 투쟁과 국민기초생활보장법 현실화 투쟁에 열성적으로 결합했었습니다. 이동권 투쟁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결합을 했었죠. 수급권투쟁 같은 경우, 혼자 살던 열사가 한 달에 약값 아파트관리비 등 60만원 정도가 소요되는데 수급액이 26만원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빚이 늘어가는 상황이었죠. 이러한 현실과 동떨어진 국기법을 바꿔 나가고자 열사는 투쟁을 했습니다."

-수급액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가면 현실화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국기법의 현실화는 단지 수급액의 현실화는 아닙니다. 장애인 같은 경우에는 몸이 자주 아파서 병원을 자주가야하고, 보행이 불편한 사람들은 교통비가 많이 들어가고, 1인가구는 주거비가 많이 들어갑니다. 금액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구유형별 계측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야만 빈곤층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국민기초생활보장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국기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소득인정액제도, 부양의무간주제도입니다. 그리고 노동연령을 61세에서 65세로 늘린 것입니다. 61세에서 65세로 노동연령이 늘어나면서 결과적으로 수급권자가 될 수 있는 나이가 61세에서 65세로 늘어난 것입니다.

소득인정액제도는 결국 소득환산율의 문제인데 기존에 갖고 있던 재산에 대한 부동산류의 재산에 대한 이자율을 너무 높게 잡아서 실제 소득으로 인정하고 있어서 문제가 됩니다.

현행 금리보다 높게 잡고 있죠. 장애인은 부동산재산이 있더라도 거기서 돈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수입이 없으면 굶어죽으란 얘기밖에 안됩니다.

부양의무간주제도는 결국 빈곤의 문제는 사회의 책임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겨서 가난을 반복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정권에서 희망을 볼 수 있을까요?

▲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준) 김태현 사무국장

"김대중 정부에서 시작했던 생산적 복지라는 정책이 빈곤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고, 정권 유지를 위한 사회안전망 구실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현 정권의 참여복지는 생산적 복지시대에서 나타났던 문제점들은 하나씩 보완해 나가겠다는 정도밖에 안됩니다. 심히 우려가 되는 부분입니다."

-다시 추모사업회 이야기로 돌아와서 추모사업회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정리를 해주시고,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십시오.

"아직 추모사업회가 아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 정체성은 장애인의 빈곤에 맞춰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추모사업회는 열사가 돌아가시기 전의 활동을 노동의 소리 다큐멘터리 팀하고 같이 영상물로 제작을 했습니다. 지난해 12월 열사의 명동성당 투쟁을 기념해 '빈곤과 장애인'을 주제로 토론회도 연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장애인실업자종합지원센터와 결합해서 국기법관련 활동가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국기법 연석회의에서 연대활동하고 있고요. 현재 이 하고 있는 일은 이 정도이지만 앞으로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공식 출범은 언제쯤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준'자를 뗄 때는 뭔가 질적인 변화가 이뤄져야한다고 보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열사의 추모1주기 기념식과 함께 4·20차별철폐공동기획단 행사와 함께 준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존에 있었던 4월 20일에 대한 이미지나 시혜나 동정으로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을 깨고 장애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차별이라는 것입니다. 내일(26일)은 그 차별을 깨는 운동의 시작은 알리는 날입니다. 열사의 삶이 워낙 사회적 차별을 겪어왔던 삶이었기 때문에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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