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시각장애인 관련 자료를 좀 찾아보려고 했더니 외가가 있는 **지역 근처에는 특수학교도 없고 교육청에도 도움 받을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런 사연을 적어서 청와대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교육청에서 장학사가 찾아오고, 그래서 대구대학교 임안수 교수님도 만났다. 대구대 임안수 교수님은 시각장애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말씀해 주셨는데 현재는 대구대를 은퇴하셨다.

“부모님이 임안수 교수님 등 여러 사람들과 의논한 결과는 일반학교가 아니라 맹학교를 가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산책길에서. ⓒ이복남

맹학교에 가기 위해서 어머니와 같이 몇 군데 맹학교를 둘러보았다.

“부산맹학교에 갔었는데, 애가 아직 어린데 집이 너무 멀어서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산맹학교를 뒤로 하고 찾아 간 곳이 대구광명학교였다. 대구광명학교는 사립이지만, 특수교육은 공립이나 사립이나 교육비가 무료다.

“광명학교는 2학년 말에 갔습니다.”

광명학교는 시각장애인학교라서 **에서 다니던 일반학교와는 다를 줄 알았다.

“저는 동화책에 나오는 박쥐 신세였습니다.”

우리는 안 보인다. 그런데 너는 일반학교에서 왔으니 우리하고는 다른 일반인이야.

“저는 새도 아니고 쥐도 아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박쥐 신세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다른 아이들은 다 점자를 알지만 그는 점자를 몰랐기에 방과 후에 남아서 점자를 익혀야 했다.

“날마다 혼자 남아서 점자를 익혀야 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나는 글자를 다 아는데 이걸 꼭 배워야 하나 싶었습니다.”

어머니는 딸만 바라보면서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토요일 오후가 되면 그를 데리러 왔다. 그런 어머니에게 어린 마음에서도 학교를 그만 두고 싶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엄마는 저를 광명학교에 입학시키고 운전면허를 땄답니다. (외)삼촌이 그러던데 누나가 겁도 없이 운전면허를 따고는 연수도 안 받고 저를 데리러 대구로 간다고 해서 삼촌이 말렸는데도 누나가 말을 안 듣더랍니다.”

어머니가 한시라도 빨리 딸을 보고 싶은 마음에, 운전면허를 따고 연수도 제대로 안 받은 상태에서 차를 몰고 **에서 대구까지 딸을 만나러 갔다는 것이다. **에서 대구까지는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인데 다행히 그날 사고는 안 났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풍경이란다.

“엄마가 저를 데리러 오면 같은 반 학생 중에서 같이 어울리는 여학생과 같이 우방랜드에 데려가곤 했습니다.”

주말마다 어머니가 그를 데리러 왔고, 월요일 아침에는 다시 학교로 데려다 주었는데 몇 달이 지나니까 학교생활에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의 그런 노력이 고맙고 죄송할 뿐입니다.”

광명학교는 특수학교라 자원봉사자들이 자주 왔는데. 대부분이 대학생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 어느 날 한 볼런티어가 사물놀이를 한 번 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 자원봉사자는 사물놀이 담당이었고, 당시만 해도 사물놀이에 특별히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학교에서 사물놀이를 하는데 사람이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사물놀이를 시작했는데 선생님이 가락을 잘 탄다며 계속 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사물(四物)은 불교 용어로 불교 의식에서 사용하는 네 가지 타악기, 즉 범종(梵鐘)ㆍ법고(法鼓)ㆍ운판(雲板)ㆍ목어(木魚)를 일컬었으나, 나중에 북ㆍ장구ㆍ징ㆍ꽹과리의 네 가지 민속 타악기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우리 전통문화에는 예전부터 풍물놀이라는 농악이 있었다. 농악은 한국의 농경문화에 기반을 두고 성장한 전통 연희문화였다. 농촌의 민중들은 풍물놀이를 각종 촌락의 행사에 활용하거나 유희 수단으로 삼아 마을의 결속력을 다졌다.

조선 후기에 성장한 유랑예인집단인 남사당 역시 여러 연희 과장 가운데 풍물놀이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전쟁, 그리고 산업화를 거치면서 농촌의 해체가 진행되면서 풍물놀이는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사물놀이 공연. ⓒ이복남

1978년 풍물놀이는 ‘사물놀이’라는 이름의 무대예술로 창단된 연주단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이들은 농악을 무대용 음악에 알맞게 효과적인 방법으로 구성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농악의 생동하는 음악성과 치밀한 연주 기교는 상당한 반응을 일으켰고, 해외 연주활동을 통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이 무렵 사물놀이를 세계적인 연주단으로 명성을 떨친 것은 김덕수 사물놀이다.

“맹학교 고등부에 다닐 때 사물놀이 연주회에서 김덕수 선생을 만났는데 그때는 김덕수 선생인 줄 몰랐습니다. 앞을 못 보니까, 나중에 다른 사람이 김덕수 선생이라고 말해 주어서 알았습니다.”

사물놀이에는 어떤 음악들이 있을까.

“웃다리 사물놀이, 호남우도 사물놀이, 호남좌도 사물놀이, 삼도 사물놀이, 삼도 설장구가락 그리고 비나리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공부보다는 사물놀이에 더 신경을 썼다.

“사물놀이는 방과 후에 했는데 사물놀이를 하면 세상만사 시름을 다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외가에 불이 났다.

“비로 인한 누전이라고 했는데, 마침 집에 아무도 없을 때라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가재도구 하나 못 건졌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사진은 하나도 없단다.

“집에 불이 나고 다시 부산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부산에서 부모님은 두 분 다 일을 하셨고 그는 중학생이 되었다.

“부산에 살 때 이제는 집에 혼자 다니겠다고 엄마한테 데리러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생활지도원 선생이 대구역까지 데려다 주었고, 구포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엄마가 혼자 다닐 때는 반드시 흰지팡이를 짚고 다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시각장애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서 도와주고 배려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흰지팡이가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인 줄 어찌 알겠느냐는 것이다.

“엄마는 눈을 감아서 도움 받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흰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라고 했습니다. 흰지팡이가 있어야 도움도 받을 수 있고, 흰지팡이가 있어야 다른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임을 알고 길을 비켜 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중에 길을 가던 나그네가 등불을 보고 반가워서 다가가 보니 등불을 든 나그네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이 왜 등불을 들고 나오셨습니까?”하고 나그네가 물었다. 그러자 그 시각장애인이 말하기를 “나는 등불이 필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므로 들고 나왔지요.”라고 대답했다. 등불을 든 시각장애인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번은 집에 가면서 깜박하고 흰지팡이를 안 가져 왔는데, 엄마에게 전화로 그 이야기를 했더니 학교에 다시 가서 흰지팡이를 가져 오라고 해서 그때는 엄마가 정말 야속했습니다.”

어렸을 때 그의 장래희망은 특수교사였다.

“어렸을 때는 나중에 커서 선생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면서 선생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보다는 서류업무에 묻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특수학교에 다녔기에 그가 보아 온 특수교사 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현장에서 함께 하고 싶었기에 사회복지사를 하고 싶었다.

“특수교사는 저의 꿈이라기보다는 어머니의 바람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특수교사는 그의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사회복지사였습니다.”

그는 사회복지사를 꿈꾸면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일단 사물놀이반이 있는 고등학교를 찾았습니다.”

그가 다니던 대구 광명학교 고등부에는 사물놀이반이 없었다.

“그래서 고른 곳이 대전맹학교였습니다.”

대전맹학교에 입학했다. 대전맹학교에 사물놀이 반은 있었지만 만만치가 않았다.

“저는 사물놀이 때문에 대전맹학교로 갔습니다. 그런데 사물놀이 선생은 복지관 등 교외 행사를 주선했는데, 담임선생이 못 가게 했습니다.”

복지관 행사에 사물놀이 공연이 있었는데 담임선생이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어디를 가느냐면서 못 가게 해서 많이 속이 상했다고 했다.

“고 1때 담임은 사물놀이 보다는 학교 공부를 중시하였는데 저는 사물놀이에 대한 열정이 커서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물놀이는 휴일 등에만 할 수 있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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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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