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는 대구에 있는 사대부속중학교를 다녔어요. 아마도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기 위하여 초등학교 6학년 때 대구로 전학을 온 듯합니다.”

아버지 친구분이 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아버지가 그분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신 것 같았다.

“자식을 좋은 학교를 보내고 싶은 아버지의 사랑이자 욕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대부중이라면 대구 중구 대봉동에 있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교 부속중학교인데 학교는 어떻게 다녔을까.

전문대 졸업식. ⓒ이복남

“제가 처음 대구에 들어올 때 삼덕국민학교였는데 그 옆에 방을 얻어서 할머니와 같이 살았습니다. 물론 사대부중과는 가까운 편이었지요. 할머니는 연로하셔서 농사일을 못 하기도 하였고 제 뒷바라지를 하기 위하여 대구로 오셨으며 중학교에 다닐 동안 계속 저를 돌봐주셨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다면서 중학교 때는 어떠했을까.

“초등학교 때부터 앞서가는 아이들을 따라잡기도 허덕였는데, 중학교 때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의 시골집은 가난한 동네였다. 그 가난한 동네서 제일 큰 부잣집이 양조장이었고, 두 번째로 잘 사는 집이 그의 집쯤 되었다. 그러나 양조장에는 돈이 많은 부잣집이었고 그의 집은 돈은 별로 없었고 그 대신 약간의 땅이 있었다.

“양조장 집 경운기가 우리 고모를 치었습니다.”

교통사고였다. 고모는 어깨를 많이 다쳤다. 아버지는 그래도 지식인이라, 고모가 시집도 안 간 처녀이므로 보상금을 요구했는데, 양조장 집에서는 보상금은 못 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면사무소를 그만두었습니다.”

교통사고와 면사무소 공무원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양조장에는 돈이 많고 아버지는 돈이 없으니까 면사무소를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재판은 지루하게 몇 년이나 계속되었다. 아버지의 퇴직금은 재판비용으로 다 날려 먹었다.

“소송은 아버지가 이긴 것 같았는데 남은 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재판에 신경을 쏟고, 어머니는 돈도 없는 가정을 꾸리느라 허리가 휘고, 그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기에 멋대로 놀아났다.

무엇을 어떻게 놀았다는 것일까?

“글쎄요. 공부는 안 하고 친구들하고 어울려 다니면서 놀았습니다. 어린 마음에 부모를 떠나 대구로 유학을 왔는데, 할머니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셔서 저를 지도하고 가르침을 줄 만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부산역에서 두 딸. ⓒ이복남

가정환경도 안 되고 아무런 친구도 없었고 낯선 동네에서 낯선 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어쩌다 보니 짝꿍이라는 친구들이 그와 죽이 맞는 친구들이라 같이 어울려 돌아다녔다.

“집에 가서 할머니와 지내는 것보다는 친구들이 좋았고 공부보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어울려 놀다 보니 3년이 훌쩍 가버리더군요.”

아버지가 재판에 몰두해 있는 동안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너무 공부를 안 해서 갈만한 학교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이른바 삼류 따라지라는 **상고에 입학했다. 재판이 끝난 아버지는 서울에서 세무사 공부를 하고 계셨는데 아버지께서도 그의 공부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던 모양이다.

“학교에서 주산과 부기를 했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도 책가방을 들고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었다.

“고3 때 아버지가 내려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세무사 시험에 합격하셨을까.

“아니요. 세무사 시험에 몇 번 떨어지면서 아버지도 포기하고 오신 겁니다.”

아버지는 그의 학력을 한심해했으나 그의 실력으로 갈 대학은 없었다. 아버지는 그의 학력을 걱정하시면서 그래도 장래를 위하여 대학은 나와야 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재수와 전문대 중 하나를 택일하라고 했다.

“저는 재수보다는 전문대학을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재수를 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재수를 한다고 해서 일류대학을 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제야 후회를 하시는 것 같았지만, 어쩌겠습니까?”

어느 절에서. ⓒ이복남

아버지가 여러 가지 정보를 취합하여 장애인 아들이 지속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는 곳을 고민하시다가 **전문대 세무회계과에 입학하라고 하셨다.

그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전문대 세무회계과를 다녔다. 아버지께서 세무사 시험은 합격을 못 하셨지만 공무원 경력 덕분인지 **중학교 행정실장으로 취업을 하셨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나도 이제 사회인이 되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세무사 사무실에 직원으로 취직을 시켜 주셨다. 비록 아버지의 백으로 취직을 했지만, 아버지의 지인 소개이기에 회사생활에는 충실했다.

“처음으로 그동안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후회도 하였으며 직무에 필요한 스킬을 배우면서 진급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기초 실력이 없어 배우는 것에 대하여 속도가 너무 느려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서 가슴만 답답했다.

“29살이었는데, 그 무렵 어머니께서 여수애양병원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장애아들은 나이가 들어도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장애를 고쳐 보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여수애향병원을 알아내셨다. 그도 할 수만 있다면 아픈 다리를 고쳐보고 싶었다. 어머니와 같이 여수애양병원으로 갔다.

필자가 오랫동안 장애인복지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6~70년대는 소아마비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사람이 한 번씩은 여수애양병원을 다녀왔다. 여수애양병원은 소아마비 병원으로 원체 유명해서 어떤 사람은 몇 년씩 기다리면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1988년 가을. 처음으로 내 인생에서 변화란 것이 시작된다는 두려움에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원장님 말씀은 왼쪽 다리는 펴고 정상적인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와 길이가 같도록 자른다고 하였습니다.

대학원 졸업식. ⓒ이복남

왼쪽 다리는 늘이고 오른쪽 다리는 자른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그때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드디어 오른쪽 다리는 5cm 정도 자르고 왼쪽 다리는 펴는 수술을 했다. 왼쪽 다리는 통깁스를 하고 여관에 누웠는데 멀쩡하던 오른쪽 다리가 염증으로 곪아오기 시작하였다. 병원에서는 재수술을 권하여서 4차까지 재수술을 하게 되었다.

“4차까지 재수술을 하는 동안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1990년이 되었습니다.”

1년이 지난 후, 직장도 없어지고 돈도 없어지고 퇴원은 했으나 후 갈 곳도 없었다.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변화를 가져봐야지 하였는데 그 시간이 너무 길어 그마저 잊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병원에서 소중한 인연을 만났습니다. 정문오, 정대용, 방대옥 등 고마운 친구들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사회에 복귀하였다. 그전보다 상태가 많이 좋아졌고 대인관계에도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당시에는 지체장애 2급이었다.

“애양병원은 정말 고마운 병원이었으며, 그로 인한 변화가 저에게 소중한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오게 된, 아니 더 행복하게 살게 된 많은 요소 중에 그 병원이 저에겐 행운이며 천사 같은 삶 그 자체입니다.”

네 번이나 재수술을 하는 등 1년 동안 엄청나게 고생은 했지만 그래도 30년을 이만큼 산 게 애향병원을 만난 덕분이라고 했다.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회계과를 나왔다면서 세무사는 되었을까.

“아버지께서도 원하시고 저도 되고 싶었지만, 세무사는 안 되었습니다. 그 대신 재무 분야의 경영지도사, 기업가치 평가사, 창업지도사 등을 땄습니다.”

결혼을 하고 애가 둘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결혼을 했을까.

“아는 지인을 통해서 중매로 결혼을 했습니다.”

그동안 연애는 한 번도 안 해 봤을까.

“아가씨도 사귀고 연애도 해 봤는데……. 이상하게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여자들이 발을 뺐습니다.”

만나는 여자들이 결혼 얘기가 나오면 뒤로 물러서는 것이 그의 장애가 또 하나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을까.

“글쎄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고 그때는 그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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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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