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공부도 잘 못 했고, 커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중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살던 고향마을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읍내 홍제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가 너무 멀어서 학교 앞에 방을 얻어서 친구 셋이랑 살았습니다.”

토요일 오후에는 고향 집으로 갔고 쌀이나 반찬 등은 집에서 가져다 먹었다.

“제가 가져오는 경우도 있고, 어머니나 큰언니가 가져다주었습니다.”

어느 날 열차에서. ⓒ이복남

중고등학교 때는 어쩔 수 없어서 시골 버스를 탔겠지만, 성인 되고 나서 버스는 거의 안 탄다고 했다.

그때부터 자가용이 있었다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일어나는 게 싫었습니다.”

다리가 불편하니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민폐이자 동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택시를 탔고, 형편이 되자 자가용을 샀다.

같이 사는 친구들 하고는 잘 지냈을까.

어릴 때부터 그래서 그랬는지 친구들도 내가 장애인이라고 해서 다투거나 특별하게 대하지는 않았기에 지금도 왕래를 하며 잘 지내고 있단다. 그런데 가끔은 친구들이 그를 부러워했다.

“너거 집은 잘살아서 좋겠다고 했는데, 우리 집이 잘사는 게 아니라 그 친구들 집이 못 살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가 중학생일 때 고향마을에는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셋집 밖에 없었는데 그의 집에 텔레비전이 있었다. 시골에서는 그런대로 먹고 사는데 부족함은 없었지만,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다. 주로 벼농사를 지었고, 콩도 심고 보리도 심었고 어머니는 표고버섯을 길렀다.

“큰언니는 엄마하고 농사를 지었고, 작은언니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근처 섬유공장 등에 다녔습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도 장애인들하고는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듣기로 장애인의 직업 재활로 금은세공을 하는 것이 낫다는 얘기가 있었다.

“한 번은 큰오빠한테 금은세공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큰오빠가 부산 조방 앞에 갈 일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장애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큰오빠는 금은세공보다는 시계수리를 배우라고 했다. 금은세공이나 시계수리는 중학교 때 나온 이야기였는데 왜 흐지부지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무렵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친구하고. ⓒ이복남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영부영 하다가 고등학생이 되었다. 고등학생 때도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다. 그러나 중학생 때 가졌던 금은세공이나 시계수리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인문계를 다녔지만, 특별히 대학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변명을 하자면, 고3 때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위암이라 몇 달 전부터 돌아가신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저혈압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까지 돌아가셔서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간 사람은 가도 살 사람은 산다고 했던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핑계라면 핑계겠지만 대학도 포기하고 시름에 빠져 있을 때 그를 격려하고 토닥거려 준 사람은 교장 선생님이었다.

“제가 장애인이라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교장 선생님이 특별히 저를 예뻐해 주셨습니다.”

밀양에서 가까운 도시는 부산이나 대구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교장 선생님은 대구에 있는 컴퓨터 자수공장에 추천을 하셨다.

“제법 큰 공장이었는데 저는 검사로 들어갔습니다.”

검사과에 모두 4명이 있었는데 직원들이 컴퓨터로 자수를 놓으면, 그 자수가 제대로 되었는지 검사를 했다.

“검사들이 불량을 잡아내면 그것을 다시 컴퓨터에 넣을 수는 없으니까 미싱으로 불량을 보완하는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컴퓨터 자수는 어떤 제품을 만들었을까.

“커튼이었는데 주로 꽃무늬였습니다. 꽃모양이랑 색깔은 자주 바뀌었는데 3년쯤 다녔습니다.”

3년을 잘 다니다가 왜 그만두었을까.

“이모집 언니가 저만큼은 아니지만 약간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 언니가 여수 가서 수술을 하고 왔다고 했다.

“큰언니는 시집을 갔고 둘째 언니가 여수에 가 보자고 했습니다.”

친구들과 경주에서. ⓒ이복남

당시 소문으로는 여수애양병원만 가면 소아마비도 기적처럼 다 고친다고 했다. 둘째 언니와 고속버스를 타고 여수애양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에서는 수술만 하면 나을 수 있다면서 수술 날짜를 잡아 주었다.

“수술 날짜를 잡고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는 양쪽 다리가 다 불편하다고 했다. 오른쪽 다리가 좀 더 심하지만, 똑바로 누워서 왼쪽 다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둘째 오빠가 차가 있어서 수술 할 때는 둘째 오빠 차를 타고 갔다 왔습니다.”

1차로 오른쪽 다리를 수술하고 통깁스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수술 후에는 근처 여인숙이나 가정집에 월세 방을 얻어 놓고 물리치료를 한다고 했지만, 그는 통깁스를 했기에 치료할 게 없었기에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수술 할 때는 아파도 참았지만, 통깁스를 하고 집에 오니 고무 냄새도 심하고 너무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부산 양정에 있는 둘째 오빠 집에 있었는데 너무 아파서 밤마다 온 동네를 돌아다녀야 했다.

“며칠 후에는 친구와 같이 고속버스를 타고 애양병원을 찾아갔습니다.”

병원에서는 수술 후에는 누구나 다 그런 거니 참고 견뎌야 된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2차 수술을 하러 갔다.

“수술실에 들어가서 마취를 하고 한참을 지나 정신이 들어서 다 끝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직 수술을 못 했다고 하더란다. 끝난 줄 알았는데 왜? 1차 수술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겁을 먹고 졸도를 해서 수술을 못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참 후에 2차 수술을 했다.

“수술을 하고 근처 여인숙에 방을 얻어서 큰언니와 같이 지냈습니다.”

큰언니가 결혼을 했는데 아직 아기가 없어서 그의 옆에서 간호를 했다.

“큰언니가 며칠씩이나 여수에서 저를 간호할 수 있게 해준 큰 형부가 고맙지요.”

수술 후에는 날마다 병원으로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녀야 했다.

수술 후에는 좀 나아졌을까.

“수술하기 전에는 그래도 오른발 발가락은 움직였는데 수술 후에는 발가락도 안 움직였습니다.”

울산 나훈아 콘서트에서. ⓒ이복남

그는 현재 오른쪽 다리에 보조기를 하고 그래도 목발 없이 걷고 있다. 보조기는 지인의 소개로 **보조기에서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일산을 사용했으나 요즘은 독일산을 사용하고 있단다. 보조기는 보장구 건강보험급여(의료급여) 적용을 받아도 150만 원 정도는 들어간다고 했다.

“수술을 하고 난 후 둘째 오빠의 지인이 피부 관리실을 소개해줬습니다.”

피부 관리실에서는 얼굴 관리를 비롯하여 전신관리를 했다. 고객의 얼굴에 맞는 화장품을 골라 바르고 마사지를 하고 팩을 하고 전신 마사지를 했다.

장애인으로서 어렵지는 않았을까.

“보조기를 하고 의자에 앉아서 하니까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일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해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 같은 것은 없었을까.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은 대부분이 점잖은 중년 부인들이었는데 장애인에 대한 편견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 무렵 지인으로부터 김** 씨를 소개받았다. 김 씨와 맞선을 보고 연애를 했다. 김 씨는 건축설비를 하는 사람이었다.

“저는 김 씨에 대해서 그저 그랬는데, 김 씨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족들과 인사를 했을 때 김 씨의 아버지가 특히 그를 며느리 삼고 싶어 했다.

“그래서 김 씨와 결혼을 했는데 저의 실책이었습니다.”

여수애양병원에 수술을 하러 다니면서 만난 친구 A 씨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고 서로 사랑했다.

“남자 집에서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를 했습니다.”

내 아들도 장애인인데 며느리까지 장애인은 안 된다는 것이다. 집에서 반대를 하니 A 씨도 어쩌지 하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당신 아들이 얼마나 잘 사는 지 두고 보자, 반대하는 결혼 안하고 싶다며 헤어지고, 김 씨와 결혼을 했는데, 김 씨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김 씨는 착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충실했다.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안 피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성실이 그를 미치게 했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술도 담배도 안 하다 보니 친구도 없고, 유일한 가족이라고는 아들과 저뿐이었습니다.”

어쩌다 친정(큰오빠 집)에 가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편에서 뚱하고 있어서 나중에는 친정에서도 서로가 불편하니 김 서방은 오지 말라고 하더란다.

“제가 밖에 나가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대서 친구들이 의처증이 있냐고 할 정도였습니다.”

도저히 김** 씨 하고는 못 살 것 같아서 이혼을 하기로 합의를 했는데 아들이 걸렸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참고 살기로 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피부 관리실에 시다로 들어가서 일을 배우고, 나중에는 원장이 일을 그만두면서 그에게 인수를 하라고 했다. 그는 피부 관리실 원장이 되어 시다 하나를 두고 일했는데 5년 쯤 지나서 그만두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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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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