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별 헤는 밤, 정호승의 내가 사랑한 사람 같은 시를 좋아하는데 그때 읽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몇 년인가 두문불출하고 집에서 책만 읽었다. 그동안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청학동에서 물질을 하시고 아버지는 회사에 나가고 형과 누나도 나이가 들어 결혼을 했다.

“어머니가 물질을 해 오시면, 소라 전복 외에 앙장구(성게)를 깠습니다.”

성게는 밤송이 같이 생겼는데 성개를 까서 노란 성게알은 생으로 먹거나 미역국을 끓이기도 한다. 성게를 제주도에서는 구살이라고 했다는데 부산에서는 앙장구라고 했다. 한 때 성게알은 대부분이 비싼 값으로 일본으로 수출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방안에서 책을 읽고 어머니가 물질을 해 오시면 성게 등을 깐 세월이 훌쩍 10여 년이 지났다.

나전칠기를 위한 데생. ⓒ이복남

“그 무렵 어느 분이 이렇게 놔 둘 게 아니라 뭐라도 해야 된다고 뭐라 했습니다.”

부모님도 동의를 했지만, 과연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인터넷도 없는 시대에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겨우 알아 낸 것은 복천동에 장애인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한 군데는 있다는 것이다.

“형수님 하고 택시를 타고 갔는데 그렇게 먼 길은 처음이라 멀미가 심했습니다.”

영도에서 복천동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 몇 번이나 구토를 하는 등 멀미가 심했다. 다행히 택시에 비밀봉투가 있어서 봉투에다 구토를 했다.

“복천동에 도착했는데 그 때는 이름이 불구자기술원이었습니다”

그가 찾아 간 곳은 양지 재활원이었다. 양지재활원은 1968 울산 신정동에서 신익균 씨에 의해서 양지불구자기술원(陽地不具者技術院)으로 설립되었으며, 1972년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으로 이전을 했고 현재는 연제구 거제동에 있다.

“양지재활원 나전칠기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스무 살 무렵이었는데 나전칠기가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 금은세공 전자 시계수리 등 여러 과가 있었는데 전부 다 정원이 찼고 나전칠기만 자리가 있었습니다.”

집에서 장애인은 그 혼자였으나 초등학교에는 장애인이 서너 명 있었다. 그런데 양지에는 전부 다 장애인이었다.

“그렇게 많은 장애인은 처음 봤습니다.”

그는 잘 걷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양목발을 짚었다.

“처음에는 기초로 그림을 그리고 자개 써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전칠기 작품 앞에서. ⓒ이복남

나전칠기(螺鈿漆器)란 칠공예의 장식기법의 하나인데 나전은 얇게 간 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형태로 오려내어 기물의 표면에 감입시켜 꾸미는 것을 통칭한다.

나전이라는 말은 한국·중국·일본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한자어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자개’라는 고유어를 써 왔다. 우리나라의 나전칠기는 일반적으로 목제품의 표면에 옻칠을 하고 그것에다 첨가하는 자개무늬를 가리키며, 그런 점에서 목칠공예에 부수되는 장식적 성격을 띠고 있다.

나전기법은 중국 당나라 때에 성행하였으며 그것이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전래의 초기에는 주로 백색의 야광패(夜光貝)를 사용하였으나 후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청록빛깔을 띤 복잡한 색상의 전복껍데기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패각이 이처럼 아름다운 빛깔을 발하는 것은 탄산칼슘의 무색투명한 결정이 주성분인 까닭에 그것이 빛을 받을 때 프리즘과 같은 색광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1년 동안 열심히 데생하고 자개를 썰고 붙이고 했습니다.”

양지재활원에서는 기술을 배우는 동안은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대부분은 1년 과정이므로 1년이 지나면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서 나가기 마련이다.

“1년이 지났는데 저는 안 나갔습니다.”

나전칠기 선생이 남아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

“지금 나가면 다른 공방에 취직을 해서 시다로 일할 테니까 남아서 선생에게 더 배우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학생들 보다 나이가 많아서인지 아니면 나전칠기에 재주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재활원에 남았다. 그리고 선생 옆에서 보조를 했는데 그래도 학생들은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재활원에는 아이들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청 주문도 들어 왔습니다.”

양지재활원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자개공장도 있었기에 주문량을 맞추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 당시에는 주로 학이나 난초 등이 나전칠기의 무늬로 많이 쓰였는데, 나전을 오린 다음에는 이것을 끼우거나 아교나 풀로 정성껏 붙이면 나전칠기가 완성된다.

친구들. ⓒ이복남

나전칠기는 보석함 등 공예품이 대부분인데 당시만 해도 자개농이 유행을 했다. 자개농은 부피도 커서 8자 9자 11자 등이 대부분이었다. -1자는 30.3cm임.

8년 만에 양지재활원을 나와서 나전칠기 공방을 차렸다. 직원을 7~8명을 두고 공방을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공방은 그런대로 괜찮아서 돈도 제법 벌었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모던 가구가 생기면서 자개농은 사양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 무렵 지인의 소개로 박00(1965년생) 씨를 만났다. 박 씨는 공무원을 하다가 그만 두었다고 했는데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도 그렇고 박 씨도 그랬는지 다방에서 만나 인사를 하고 서로가 다음에 만날 기약도 없이 ‘안녕히 가세요’하고 헤어졌다. 그 뿐이었다.

“더 늦기 전에 나전칠기를 그만 두어야겠다 싶었습니다.”

나전칠기 공방은 문을 닫고 친구 소개로 헌옷 수거를 했다. 헌옷을 수거해서 팔았는데 수거는 거의 공짜로 하고 돈을 받고 팔았으니 제법 수입은 있었다.

“양지에 있을 때, 양지도 기독교 재단이라 예배를 보고 교회를 다녔는데 그때는 건성이었습니다.”

양지를 그만 두고 대신동 **교회를 다녔는데, 부흥회에서 회개의 기도 중에 저절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때 신앙적으로 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전까지는 교회를 다녀도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허랑방탕한 생활이었는데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야 41장 10절이 머리를 쳤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 무렵 우연히 박 씨를 다시 만났다. 처음 박 씨를 만나고 3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때부터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착실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결심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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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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