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8년 만에 이혼을 결심했다. 윤 씨는 아이를 자신이 키우고 싶었지만 남편의 성격이 워낙 괴팍했기에 아이를 자신이 데려왔다가는 남편의 행패를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윤 씨의 친정 부모님도 설마 자기 자식을 어떻게 하겠느냐며 아이를 보내라고 했다. 멋모르는 아이는 어머니와 떨어져 슬펐지만 어른들의 일이라 강화도로 아버지를 따라갔다.

“1학년을 다니다가 강화도 송해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조성태씨. ⓒ이복남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엄청 활발했는데 강화도로 와서는 많이 의기소침했던 것 같다고 했다. 아마도 엄마가 없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지만 더 이상 그의 곁에 어머니는 없었다.

“아버지가 집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저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강화도의 송해면은 바닷가는 아니고 일종의 내륙인데 엄마 없이 할머니 손에 자라다 보니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았다고 했다.

“학교생활에도 잘 적응을 못하고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한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조용한 아이였다. 집에 오면 근처에 저수지가 있어서 저수지 근처에서 혼자 놀거나 때로는 또래 친구들하고 자치기도하고 딱지치기도 했었다.

“큰아버지는 저 먼데 학교 선생이라고 하던데, 아버지하고 작은 아버지는 걸핏하면 저더러 술을 사오라고 했습니다.”

꿈나무시절에도 꿈이 없었다고 했다. 학교공부도 재미가 없었다. 아침이면 할머니가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학교로 안 가고 저수지가 있는 뒷산에 올라 도시락을 까먹곤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도 경기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는 잘 안 갔는데 할머니도 아버지도 학교 안 가는 것에 대해서 별로 탓하지 않았다고 했다. 학교를 안 가는 날이면 집에서 마늘도 까고, 가을이면 뒷산에 올라가서 밤도 줍곤 했다.

“하루는 작은 아버지가 무엇 때문인지 ‘엎드려뻗쳐’라는 벌을 세웠는데 왜 그랬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버지가 그것을 보시고 작은아버지와 대판 싸웠습니다.”

그 후에는 아버지가 자전거도 사주시고 과자 등 먹을 것을 사주기도 했으나 아버지는 병원을 자주 들락거렸다. 나중에 커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이라 정신병원인 것 같았다.

“중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아버지와 할머니가 어찌 할 거냐고 물었다. 꿈에도 못 잊을 그리운 어머니였다. 그는 당연히 어머니를 따라 가겠다고 했다. 할머니와 아버지 등 친척들도 그러라고 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다.

어느 날 밤의 유희. ⓒ이복남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 부산에서 살게 되었을까.

“막내 여동생이 결혼을 해서 부산에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 이혼 할 때 아이를 데려오고 싶었지만 만약 아이를 데려오면 남편이 찾아와서 때리고 행패를 부릴까봐 무서워서 못 데려 왔다고 했다. 부산 동생집 근처에 살면서 직장을 다니다가 건물 청소도우미를 했다.

처음에는 아들을 안 데려 왔는데 몇 년이나 지나서 어떻게 아이를 데려올 생각을 했을까.

“시어머니도 교회 권사였어요. 그럼에도 왜 그렇게 그 가정에 문제가 많을까 날마다 기도를 했는데 시어머니가 하나님을 못 만난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윤 씨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는데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더란다. 강화도에서도 아이는 자주 경기를 해서 밤에도 가까운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고 했다.

“아이를 데려와서 같이 교회에 나가면서 하나님을 영접시키니까 경기나 열병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부산에 와서 처음에는 주례 쪽에서 살았다. 집 근처 동주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그러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친구들하고 어울리기는 했지만 공부는 잘 못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공부를 잘하고 싶었지만 공부가 잘 안 되었다.

중학교는 겨우 졸업했지만 고등학교는 갈 곳이 없었다. 담임선생과 의논 끝에 어머니도 괜찮다고 해서 청학동에 있는 부산해사고에 입학했다.

해사고는 선원이 되는 학교가 아닌가?

“옛날에는 선원학교라던데 제가 다닐 때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항해과와 기관과가 있었는데 결국은 해기사를 양성하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둘이서 어렵게 살았으므로 영세민이 되어 영도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영도에서도 어머니는 청소도우미를 하셨다.

“그런데 해기사가 되기 위한 해사고는 저하고는 잘 안 맞는 것 같았습니다.”

1학년을 겨우 마치고 중퇴를 했다. 학교를 중퇴하고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아버지가 위독하다고 강화도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는 그래도 아들이니까 아버지의 임종은 지켜야 된다며 어머니와 함께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런데 서울역에서 내리니까 큰아버지께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올 필요 없다고 하셔서 강화도까지 가지 않고 도로 부산으로 내려 왔습니다.”

그 후에 강화도에는 가보지 않았을까.

“할머니가 돌아 가셨다는 얘기를 나중에 듣고, 한번 강화도에 간 적이 있습니다.”

강화도에는 아버지도 안계시고 할머니도 없는데 아는 사람이 있었을까.

“시골이라 친척들이 있었고, 초등학교 동창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후 학교도 가지 않고 집에 쉬고 있으려니까 교회에서 경주에 있는 대안학교를 소개했다. 그는 경주 대안학교로 갔다.

“규율도 엄청 빡빡하고 오히려 상처만 받고 중퇴를 했습니다.”

대안학교에서도 나갈 사람은 다 나가라고 해서 그도 상처만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가스충전소에 2년 정도 알바를 했다. 가스충전소에는 제법 오래 다녔는데 2년 쯤 지나자 돈이 안 맞는다고 사장이 자기를 의심하는 같아서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의 한 때. ⓒ이복남

그를 즈음 IMF 이후 여기저기서 국비지원 직업학교가 성행을 했다. 누군가가 어머니에게 직업학교를 다녀보라고 했다. 어머니는 미용학교와 양재학교 중에서 고민하다가 양재학교를 택했다.

“어머니는 양재학교를 졸업하고 집 근처에 옷수선 집을 차렸습니다.”

어머니가 옷수선 집을 차리면서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아들의 학력을 안타까워했다. 어머니가 백방으로 알아보시더니 장림에 있는 00실업학교에 입학시켰다.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그래도 학교는 졸업했다.

어머니는 그 때까지만 해도 아들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었기에 아들을 00사이버대학 사회복지과에 입학시켰다. 조성태 씨는 사이버 대학을 다니면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다. 돈을 벌면 어머니에게 다 갖다드리고 그가 필요한 용돈은 어머니에게 받아서 썼다.

어머니는 아들을 대학에 입학 시켰으니 졸업만 하면 취직도 하고 돈벌이도 할 줄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복지사가 된다는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복지사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학교 공부를 하느라고 그랬는지 우울증이 왔고 대인기피증에다 공항장애도 온 것 같았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아들에게 학교를 그만 두게 했다.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러다가 아들을 잡을 것 같았던 것이다.

아들의 대인기피증이나 공항장애 등이 더 심해진 것 같아서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정신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는 장애인등록을 하라고 했다. 조성태 씨는 병원에서 이것저것 심리검사를 받고 지적장애 3급을 받았다. 그 때가 스물네 살이었다.

“그 때부터는 거의 일을 못 했습니다.”

그야말로 어머니가 옷수선으로 버는 약간의 수입 그리고 기초생활수급비로 겨우 먹고 살면서 빈둥빈둥 백수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2010년 동삼동(현 함지로 76번길)에 영도구장애인복지관이 개관하였다. 영도구장애인복지관에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많았지만 그가 관심이 가는 것은 운동프로그램이었다.

“처음 탁구부에 들었습니다.”

탁구는 재미도 있었고 할만 했다. 탁구를 하면서 전국체전에는 출전을 했을까.

“지적장애인 중에 탁구를 잘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탁구를 전문적으로 배운 것 같은데 저는 너무 늦어서 실력이 그렇게는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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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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