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 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 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 때

그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

이 시는 류시화 시인의 ‘저편 언덕’이다. 저편 언덕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시인은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슬픔에 의지하되 그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고 했다.

조성태씨. ⓒ이복남

사람 인(人)을 보면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는 살 수가 없으므로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하므로 서로 기대는 모습을 본떴다는 설이 있다. 사람 인(人)이 아니라 해도 누구나 홀로 산다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고 있다. 부모에게 친구에게 스승에게 그리고 바람에 기대어 살고 별과 달에 기대어 살고 노래에 기대어 살고 춤에 기대어 살고 돈에 기대어 살고 슬픔에 기대어 살기도 한다.

그렇게 기대어 사는 것들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면,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 나 혼자 남겨져 있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조성태 씨는 어쩌면 허허벌판에 홀로 남겨진 단 한사람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 때 그의 손을 잡아서 자신을 기대게 한 또 하나의 기둥은 어머니였다. 무릇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를 기둥삼아 기대며 그 기둥 아래서 자라기 마련이지만 조성태 씨의 경우 조금은 남달랐다.

조성태(1981년생) 씨는 서울 성동구 자양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혼자였다. 어머니는 과일가게를 하셨고 아버지는 직업은 없고 술과 도박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였다.

“어렸을 때 저도 어머니도 아버지한테 많이 맞았습니다.”

어렸을 때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매일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 왔고, 집에 오면 그와 어머니를 때렸다. 왜 무엇 때문에 아버지에게 맞았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필자는 조성태 씨를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는 어머니와 통화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다. 어머니 윤 씨에게 전화를 하니 아들한테서 얘기 들었다고 해서 어머니와는 좀 더 수월하게 인터뷰를 할 수가 있었다.

젊은 날의 친구들. ⓒ이복남

결혼 전 어머니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어느 날 몸이 안 좋아서 기도원을 찾았다. 기도원은 산속에 있었는데 기도원 가는 길에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기도원으로 가고 있는데, 제가 맘에 든다면서 며느리 하자고 합디다.”

아주머니는 아들과 함께 근처 여관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강화도가 고향이고 슬하에 아들 셋이 있는데 큰 아들은 공부를 잘해서 대학도 나와서 교편을 잡고 있는데 아래 두 아들은 장가도 못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며느리를 구하러 서울로 와서 여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머니는 윤 씨에게 우리 며느리 하자고 졸랐다. 윤 씨는 아주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아주머니를 따라갔다.

윤 씨는 어쩔 수 없이 아주머니를 따라서 여관에 머물고 있다는 조 씨를 만났다. 아주머니를 따라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만나보니 조 씨가 정말 불쌍해 보였다.

윤 씨는 집에 와서 부모님께 조 씨와 결혼 하겠다고 했다. 부모님이 조 씨를 만나 보더니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아주머니와 조 씨는 윤 씨에게 매달렸지만 윤 씨 부모님의 반대는 완강했다.

“저는 참으로 진퇴양난이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결국 윤 씨는 조 씨와 결혼했다. 성동구 자양동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조 씨는 직업도 없고 물론 돈벌이도 없었다. 윤 씨 친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윤 씨에게 조그만 과일가게를 차려 주었다.

“조 씨가 불상해서 결혼은 했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 술에다 도박에다 집에 오면 저를 때렸습니다.”

윤 씨는 결혼 하고 얼마 후에 임신이 되었는데 윤 씨의 임신에도 불구하고 조 씨는 술이 취해서 집에만 오면 윤 씨를 때렸다. 아내 윤 씨는 남편 조 씨의 폭력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조 씨는 술만 취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이 난폭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조 씨는 기억도 안 나는 어제 밤의 난폭함을 윤 씨에게 사죄하며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는 가운데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순간순간 경기를 했습니다.”

어머니 윤 씨는 밤이고 낮이고 아이가 경기를 하면 응급실로 데려가야 했다. 아버지의 폭력은 여전했지만 아들은 그래도 무럭무럭 자랐다. 그런데 아들이 자라면서 어딘가 이상했다. 윤 씨 눈에는 물론이고 주의 사람들도 아이가 어딘가 모자란 것 같다고 했다.

“아이를 가졌을 때 그렇게 남편한테 얻어맞았으니 아이가 온전할 리가 있겠습니까?”

젊은 날의 한 때. ⓒ이복남

지적 장애를 가진 경우 언어 지연, 인지, 학습 기능의 발달에 문제를 보인다. 이러한 발달 문제로 인하여 사회적 판단이나 위험의 인식, 행동이나 감정의 조절, 대인관계, 학교나 직장에서의 동기 유발 등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경도 지적장애인의 경우, 학령전기에는 명확한 차이가 없을 수도 있으나, 학령기, 성인기에는 읽기, 쓰기, 계산, 시간, 돈과 관련된 학습기술을 배우는 데 어려움이 있으며, 추상적 사고, 인지적 유연성 및 계획하기, 단기 기억 등의 어려움을 보인다.

경도 지적장애인의 경우, 학령기에는 학교에서는 학습에 어려움을 겪기 쉬우며, 성인기에는 일을 하고 좋은 사회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그런데 조성태 씨는 다운증후군이나 윌리엄스증후군 등 염색체 이상도 아니고 선천성 대사장애도 아니었다. 어머니 윤 씨는 임신 중에도 남편에게 많이 맞았고, 아이가 태어나서도 자주 경기를 했으며, 아버지에게 얻어맞기도 하는 바람에 그리된 게 아닌가 짐작할 뿐이란다.

“그래도 아이가 유치원에는 다녔습니다.”

아들이 다른 아이들 보다 약간은 느리고 서툴기는 해도 선생님이나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아이만 보고 8년을 참고 살았는데 한계가 온 것 같았습니다.”

과일가게를 해서 조금만 돈이 모이면 남편이 윤 씨를 때리고 돈을 다 뺏어갔다.

“성태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는데 학교생활도 잘했고 친구들하고도 잘 어울렸지만 제가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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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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