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렀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 시는 이육사의 ‘광야(廣野)’다. 젊은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초인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가슴 벅차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육사가 기다리던 초인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육사에게는 초인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을 수 있는 독립군이었을까.

이육사는 경북 안동 출생으로 본명이 원록이라고 한다.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투옥되었다. 그 때의 수인번호가 264여서 호를 육사로 택했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이원록은 일본의 패망을 바라는 의미에서 필명을 육사(戮史)라고 쓰고 싶었지만 그러면 일본이 알아챌 것이므로 이육사(李陸史)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박일복 씨. ⓒ이복남

이육사는 시대적 절망과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기대로 매화향기를 뿌릴 초인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해방된 조국에서 광복을 가져올 초인 같은 것은 소용없어진 지 오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광야’를 들고 나온 것은 박일복 씨가 ‘광야’를 좋아했다고 했다. 더구나 하루는 죽고 하루는 사는 삶 속에서 초인(超人)이 아니라 초연(超然)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일복(1955년생) 씨의 고향은 경북 경주지만 어릴 때부터 부산진구 전포동에서 살았다. 그는 2남 3녀의 장남인데 아버지는 말단 공무원으로 밥은 먹고 살았으나 집안은 언제나 가난했다.

“어릴 때의 꿈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다 되는 것 같았다. 그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돈만 있으면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전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항도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공부는 그런대로 했다.

부모님은 세무공무원을 하라고 했다. 그가 장남이라 세무공무원은 안정적이고 아버지 보다는 나을 거라고 했다. 그는 돈 많이 버는 거 외에는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으므로 부모님 뜻에 따라서 세무공무원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2014년 울릉도 학술세미나 후. ⓒ이복남

그가 중학생일 때 포니 자동차가 나왔는데 포니가 부러웠다. 그도 커서 돈을 벌면 포니 자동차를 가질 거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는 중학생 때 포니가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는 1976년이 되어서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출시되었으므로 중학생 때는 지났을 것 같다.

가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때까지 밴드부에 있었다. 공무원이 되고 싶었는데 밴드부에는 왜 들어갔을까.

“음악에 관심도 있었고 제복도 멋있어서 군악대를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불었다. 밴드부에 있으니 거리 행진에는 콰이강의 다리 등 행진곡을 주로 했지만 그 밖에도 거의 날마다 각종 행사에 불려 나갔다. 학교 행사뿐 아니라 온갖 지역 행사에 동원되었다. 따라서 수업시간에는 빠져도 상관없었다. 밴드부는 열외였으므로…….

“규율도 엄격했고, 담당자는 돈을 받겠지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고, 날마다 불려 나가는 행사도 너무 많아서 밴드부를 그만두었습니다.”

군악대에 가는 것도 미련 없이 그만 두고 다시 입시공부에 매달렸다. 그동안 밴드부 하느라고 공부를 제대로 못해서인지 공부가 잘되지 않았다.

세무공무원이 되겠다던 어린 시절의 꿈은 오간데 없고 공대를 가겠다고 인하공대를 쳤는데 떨어졌다. 재수를 하는데도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이럴 바엔 그냥 군대나 가자 싶어서 그동안 연기했던 군대를 갔다.

2016년 여수 오금도 비렁길. ⓒ이복남

군대는 강원도 철원에서 육군 보병으로 근무했다. 제대를 했으나 다시 재수를 하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취직을 하기도 마땅찮았다. 그는 00전문학교를 가겠다고 했다.

“우리 집 장남은 항상 옳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부모님도 특별하게 그를 닦달하지 않고 그를 믿는다고 했다. 00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전포동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그 무렵 여동생에게서 친구를 소개 받았는데 만나 보니까 아는 얼굴이었다. 예전에도 여동생과 같이 집에 자주 놀러 왔던 아이었다.

만나 보니까 그런대로 맘에 들었다. 1981년 여동생의 친구 김연숙(1960년생) 씨와 결혼했다. 현재 슬하에 1남 1녀가 있는데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의사가 되었다.

대우자동차를 다닐 때 노조활동을 하면서 노조에서 서무를 봤다. 그는 노조활동을 하다 보니 자신과는 잘 안 맞는 것 같아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무엇을 할 것이냐? 그는 심사숙고했다. 친구들이 이것저것 조언을 했다.

“사람들은 다 똑똑한 박사(?)들입니다. 그러나 실체경험은 별로 없는 탁상공론이지요.”

박일복 씨 부부. ⓒ이복남

그는 장사를 생각했는데 밑바닥부터 시작해 보려고 했다. 구서시장에 점포를 얻었다. 야채장사를 해 보려고 했지만 뭐가 잘못 되어 계약부터 삐걱거렸다. 하는 수 없이 아직은 저소득층이라는 반송과 반여동 일대를 돌아다녔다.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마땅한 가게가 없어서 한참이나 만화방에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며칠 만엔가 반여동에서 신축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가게를 얻고 싶다고 했더니 건물 주인이 뭐 할 거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을 못했다. 그동안 가게 얻는데 만 급급했지 무엇을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한 시간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는 건물 주인에게서 한 시간의 말미를 얻어서 심사숙고 했다. 점포를 얻으러 다니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니, 자신이 생각해 봐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그 때는 그랬습니다.”

한 시간 후에 다시 건물 주인을 찾아갔다.

“중국집을 하겠습니다.”

2014년 해외문화탐방 베트남 후에왕궁. ⓒ이복남

저소득층이라 짜장면을 배달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건물주인은 안 된다고 했다. 중국집은 장사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젊으니까 해 보겠다고 떼를 썼다. 건물 주인도 나중에는 잘하고 못하고는 당신 탓이니 마음대로 해 보라고 했다.

점포 45평을 얻고 나니 시설비가 없었다. 주방 뒤에 방을 하나 넣어서 식구들은 그곳에서 생활했고 중국집 운영은 아내도 같이 했다. 그가 하는 일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밀어 주시던 부모님도 중국집은 반대했다. 그는 장사 경험도 없을뿐더러 중국집 요리사도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은 반여동에 대우자동차 사택이 있어서 그쪽을 믿은 겁니다.”

그 무렵 막 시작한 국민카드를 사용하면서 개업식에는 동네 유지들을 전부 초대했다. 시작은 제법 삐까번쩍했다. 그러나 한 달 쯤은 아는 사람들의 안면치레였다. 한 달이 지나자 주방장 월급도 안 나왔다. 후회막급이었지만 이제 와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2편에 계속>

{공고}2019년 에이블뉴스 칼럼니스트 공개 모집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