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도 회사를 그만두라고 했다.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구서동에 있는 트랜스 제조업체에 취업을 했다. 다시 열심히 일을 했다. 다른 가족들은 나름대로 달라지고 발전하며 변화하는 동안 그는 묵묵히 회사를 다니며 일만 할 뿐이었다.

“5년 10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회사를 그만 두었을까.

“회사가 정관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너무 멀어서 정관까지 따라 갈 형편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장애인고용공단 부산지부를 찾아 가 봐도 마땅히 취업할 만 한데가 없었다.

딸이 어렸을 때. ⓒ이복남

여동생은 결혼을 했고 한 때 방황하던 남동생도 마음을 잡고 취업을 해서 집을 나갔다. 그러나 그는 갈 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는 할 일 없는 백수였다.

백수에게도 세월은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홀로 남겨진 큰아들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짝을 지어 주고 싶어 했다.

그동안 여자 친구가 없었을까.

“저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버지는 여기저기 결혼정보회사를 기웃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웃거려 봐도 아들의 신붓감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아버지가 낙담하고 있을 때 한 결혼정보회사에서 그에게 귀띔을 했다.

“외국인 신부는 어떠세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물음이었다. 아하, 한국인 신붓감이 어렵다면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그런데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결혼을 하려면 직업이 있어야 됩니다.”

밥은 먹고 살만한데 직업이 없어서 그래서 모두가 고개를 저었구나. 아버지는 고심했다. 예전에 납땜을 했다고 하지만 납땜기술로 취업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상균이 무엇을 해야 하나’ 고심할 때 한 지인이 충고를 했다.

“장사를 한 번 해보지 그래요?”

장사라면 어디서 무슨 장사를 해야 할까. 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구포 일대를 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A대학 부근에서 슈퍼 하나를 발견했다. 마침 슈퍼가 임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슈퍼를 임차했습니다. 상균이도 해 보겠다고 했고 아내도 반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임대(賃貸)와 임차(賃借)는 상반되는 말이다. 임대는 대가를 받고 내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는 것이고, 임차는 요금을 내고 남의 물건을 빌려 쓰는 것이다. 여기서 슈퍼 주인이 슈퍼를 임대했고 임상균 씨가 그 슈퍼를 임차한 것이다.

2010년에 임상균 씨는 슈퍼를 얻어서 사업주 즉 슈퍼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베트남에 신붓감이 있다고 했다.

예쁜 우리 딸. ⓒ이복남

“저는 별로 결혼할 생각이 없었지만 저의 결혼이 아버지의 소원이었습니다.”

2천5백만 원쯤 들여서 베트남을 갔다 왔다. 그리고 23살의 베트남 신부 B 씨가 왔다. 사랑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정 들이고 살면 괜찮아 지겠지 싶었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살았는데 집안 살림은 전부 어머니가 했다. 그래도 신랑 신부가 만났으니 아이가 생겼다. 딸이었다. B 씨는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직장을 다녔다.

“직장을 다니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직장을 다녔습니다.”

B 씨는 근처 공장에 다녔는데 아침에 나가면 밤늦게야 돌아왔고 어떤 날은 돌아오지도 않았다. 공장에 가면 같은 베트남 여자들이 있는 것 같았다. 월급을 얼마나 받는지 모르겠지만 집에는 한 푼 주지도 않고 혼자 벌어서 혼자 다 쓰는 모양이었다.

그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슈퍼로 출근하고 밤 10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갔다. B 씨도 아침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거나 때로는 안 오기도 했으므로 잠깐 신혼 때를 제외하곤 B 씨 얼굴 보기도 어려웠다.

처음에는 그런 일로 티격태격 부부 싸움을 하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러면 B 씨는 아예 집을 나가 며칠씩 안 들어 왔던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베트남 여자들도 한국에 와서 아이 낳고 가정을 꾸리며 착실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던데 B 씨는 결혼 생활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는 한국으로 오기 위해서 그를 이용한 것 같았다. 부모님과의 갈등도 심했다. 그렇게 티격태격 하는 세월이 5년이나 되었다. 5년 쯤 되었을 때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그도 이혼은 원치 않았고 부모님도 이혼은 안 된다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집을 나가더니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이혼 사유는 남편의 폭력이었다.

“참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아내를 때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결혼생활을 할 의사가 없으면서 한국에 와서 체류자격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이용한 것 같다는 것이다. 이혼 소송은 2년 여 동안이나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판결이 났다. 그는 B 씨를 때린 적이 없으므로 B 씨는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매달 20만원씩 딸의 양육비를 임상균 씨에게 지급하고, 한 달에 4번 딸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판결이 난 것이 서너 달 전이었다. B 씨는 첫 달에 20만원을 보내왔고 딸을 한 번 만났다고 했다. 그 후에는 아직 양육비도 안 주고 딸을 만나러 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 여자는 영주권이 없습니다. 그런 판결이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임상균 씨와 부모님. ⓒ이복남

임상균 씨가 한국 사람이므로 B 씨는 결혼 비자(F-6)로 한국에 왔을 것이다. 그리고 결혼 비자(F-6)로 체류자격은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혼 단절(이혼)이 되었으므로 한국에서 더 이상 체류할 수가 없다. 그 때를 대비해서 이혼을 했으나 자녀 면접권과 양육비 지급 판결을 받았으므로 체류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자가 집을 나가 이혼 소송을 제기했을 때는 결혼 한 것이 후회가 되어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괜히 결혼해서 이 고생을 한다 싶어서 가슴을 쳤다. 그러나 소송이 끝나고 이제는 좀 진정이 되고 나니, ‘금쪽같은 내 새끼’ 딸 하나 얻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한단다.

“만약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디서 이렇게 예쁜 딸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임상균 씨는 예쁜 딸의 사진을 필자에게 내 보였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손에 자라서 그런지 별로 엄마 B 씨를 찾지도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아직은 부모님이 계시고 사랑하는 딸이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슈퍼가 장사가 잘 안 된단다. 편의점도 생기고 마트도 생기고 무엇보다도 시대상황 같다고 말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취직을 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습니다.”

한 달에 임차료와 전기세 등 50여만 원이 나가는데 그 돈을 빼고 나면 인건비도 안 나온다는 것이다.

“장애인복지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좋아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장애인도 직장을 가지고 일할 수 있고, 걱정 없이 밥 먹고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단다.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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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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