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넘어져서 무릎에

빨갛게 피 맺혀 본 사람은 안다.

땅에는 돌이 박혀 있다고

마음에도 돌이 박혀 있다고

그 박힌 돌이 넘어지게 한다고.

그러나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넘어져서 가슴에

푸른 멍이 들어 본 사람은 안다.

땅에 박힌 돌부리

가슴에 박힌 돌부리를

붙잡고 일어서야 한다고.

그 박힌 돌부리가 나를 일어서게 한다고.”

이 시는 이준관 시인의 “넘어져 본 사람은”이다.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넘어져서 무릎에 피멍이 들어봐야 땅에는 돌부리가 박혀있고 그 돌부리가 가슴에도 박혀 있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가슴에 박힌 그 돌부리가 그를 일어서게 한다는 것이다.

임상균 씨. ⓒ이복남

언제부터인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림’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다. 함께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장애를 자진 사람과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린다고 해서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노래가사처럼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임상균 씨를 만났을 때 첫마디가 “복지가 너무한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장애인복지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실제로 좋아진 게 뭐냐고 했다.

“돈 준다고 오라고 해 놓고 가니까 등급 새로 받으라고 하더라.” 뭣 때문에 새로 받아야 되느냐? 등급판정해 준 의사를 못 믿겠다는 것 아니냐. 재등급 받으면 2급 안 줄 거면서 왜 돈 준다고 했느냐. 돈 안 줄려는 꼼수 아니냐. 꾀병부리고 엄살 부려서 높은 등급 받은 사람도 있던데 나는 그러기 싫었다.

그래서 재등급을 안 받았다. 임상균 씨는 뇌병변장애라 말도 약간은 어눌한데 그 어눌한 말투로 불만을 쏟아냈다.

임상균(1976년생) 씨는 부산진구 당감동에서 2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저는 선천성 뇌성마비인데 그래도 부모님은 저를 낫게 하려고 병원도 다녔고, 침도 많이 맞았습니다.”

가족들과 해수욕장. ⓒ이복남

뇌성마비란 여러 원인인자에 의해 미성숙한 뇌 혹은 뇌의 손상으로 인해 임상적으로 운동과 자세의 이상을 보이는 비진행성 증후군이다. 뇌성마비에 걸린 아동들은 마비로 인하여 자발적인 운동이 어렵고,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있거나 혹은 표정근육을 포함한 몸의 많은 근육들이 뒤틀리는 증상이 나타난다. 간혹 언어장애, 인지장애, 뇌전증 등을 수반하는 경우가 있다.

뇌성마비는 원인은 잘 모르거나 매우 다양하여, 자궁 내 또는 태아기의 염증, 뇌의 기형, 뇌손상을 수반하는 유전적 증후군이나 산소 결핍증이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장애인복지법에 의거한 장애인등록은 1988년 11월 1일부터 시작했는데 당시만 해도 뇌성마비는 지체장애인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장애인복지법이 개정되어 2000년 1월 1일부터 뇌병변장애인으로 분류되었다.

그는 대여섯 살 까지는 방안에만 누워있었고 병원 등 외출을 할 때는 어머니 등에 업혀 다녔다. 어릴 때는 밖에 나가지도 못했기에 어린 시절에는 병원 다니고 침 맞은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명덕초등학교를 다녔는데 1학년 1학기까지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다녔는데 2학기부터는 조금씩 걸을 수 있어서 혼자 다녔다고 했다. 장애인이라고 친구들이 놀리지는 않았을까.

“크게 느끼지는 못했지만 걸음을 잘 못 걷는다고 친구들이 비실이라고 불렀습니다.”

임상균 씨는 집은 북구 화명동인데 구포 모 대학 앞에서 조그만 슈퍼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오전이 한가하다고 해서 오전에 그를 찾아갔는데 간간이 손님들이 왔다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부모님이 오셨다. 부모님은 필자가 온다는 것을 몰랐지만 택시를 하는 아버지가 쉬는 날이라서 아들을 보러 들렀다는 것이다.

임상균 씨는 아침 6시 30분 슈퍼에 출근하여 저녁 10시 30분까지 하루 16시간을 슈퍼에 근무하면서 밥도 직접 해 먹는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장사가 잘 안 됩니다.”

8년 전 처음 슈퍼를 인수할 때만 해도 제법 장사가 잘되었는데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시대적인 추세 같다고 했다.

슈퍼는 슈퍼마켓(supermarket)의 준말인데 식료품이나 일용잡화 등의 가정용품을 셀프서비스 방식으로 판매하는 소매점이다. 사전에는 현금판매를 한다고 되어 있었으나 요즘은 대부분이 카드판매도 하고 있다.

마트(mart)는 생산자로부터 물품을 대량으로 구매해 판매하는 방식으로 시중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유통업체인 할인점의 일반적인 명칭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전에 만난 어떤 장애인은 슈퍼에 물건을 대주는 영업활동을 했는데 마트가 생기면서 부도를 맞게 되어 망했다고 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이복남

아들은 새벽에 나가고 밤에 들어 와서 집에서는 아들 얼굴 보기도 어려우므로 오랜만에 아들 얼굴을 보러 왔다는 것이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아버지께 명함을 드리자 아버지도 임상균 씨처럼 “나라에서 해준 게 뭐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슈퍼가 장사도 안 되는데 들어가는 돈만 늘고 제대로 된 직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슈퍼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손보시는 동안 어머니에게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임상균 씨는 선천성 뇌성마비라 그 이유를 잘 모른다고 했는데, 어머니는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다.

당시 부모님은 당감동에서 신발공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신발공장에서 둘이 눈이 맞아 아무도 몰래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 때는 결혼식도 안했고……. 결혼식은 첫애를 낳고 했단다.

어느 날 남편의 친가에서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시어머니가 찾아 와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세간 다 때려 부수며 난리를 쳤다는 것이다.

“그 때 얼마나 무섭고 놀랬든지 정신이 없었고, 그 다음부터는 몰래 숨어 다녔습니다.”

시어머니가 왜 그렇게 반대를 했을까.

“첫째는 아들이 돈을 안 갖다 주니까요.”

아하, 부모님에게 돌아갈 월급을 중간에서 며느리가 가로채니까 화가 날 수밖에 없었겠구나. 그 때는 임신인줄도 몰랐는데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큰애가 저렇게 된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배가 불러 오자 신발공장의 본드 냄새를 더 이상 맡을 수가 없어서 신발공장도 그만두었다고 했다.

“3개월까지는 잘 몰랐습니다.”

상균이가 태어나서 3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목을 못 가누더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아이를 업고 병원을 찾았더니 뇌성마비라고 하더란다. 청천벽력이었다. 두세 군데 병원을 더 가보기는 했지만 의사들도 고개를 저었다. 뇌성마비에 좋다는 것은 이것저것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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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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