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는 택시운전을 했고 네 식구가 단칸방에 살았다. 주변의 권유로 그는 장애인등록을 해서 지체장애 3급을 받았다.

“지체장애 3급으로 개금 도개공(도시개발공사) 영구임대 아파트에 들어갔습니다.”

야구장에서. ⓒ이복남

초등학교 3학년 이후에는 재발하지 않았기에 병에 대해서는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의 어느 날 친구들과 놀다가 쓰러졌다. 어머니도 놀랐고 119를 불러서 A병원으로 갔다. 안된다고 했다. 그는 처음부터 A병원에서 수술을 했고 그동안 계속해서 A병원에서 진료해서 약을 먹고 있었는데 안 된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어머니는 의사에게 항의했다.

“우리 병원에서는 어려울 것 같으니 B병원으로 가보십시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아들을 B병원으로 데려 갔다.

“B병원에서 감마나이프 수술을 받았습니다.”

감마나이프는 두피나 두개골을 절개하지 않고 감마선을 사용해 머릿속의 질병을 치료하는 최첨단 뇌수술 장비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방사선수술 장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 후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했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일반학교가 아니라 기술학교를 가라고 조언했다. 그는 기술학교 전자과에 진학했다. 전자과에서 납땜도 하고 전자기기를 공부하면서 전자기기 기능사 자격을 따기도 했으나 졸업 후 취업이 잘 되지 않았다. 그는 오른팔과 오른손 그리고 오른 다리를 잘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이었던 것이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고심하던 중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운영하는 부산직업능력개발원(이하 개발원)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도 전자과를 다녔기에 전자과에 입학했다. 개발원은 부산시 기장군 정관읍에 있어서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1학기 수업이 끝날 무렵 C라는 자봉(자원봉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C의 집은 평택이라고 했다. 집이 평택인 C가 어떻게 해서 부산 개발원에 자원봉사자로 왔을까? C에 대해서는 그도 자세한 것은 잘 알지 못했다.

혹시라도 C에게 연락이 되면 어떻게 해서 개발원까지 왔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려 준 얘기는 C가 나사렛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다니는 학생이었다고 했다. 나사렛대학교에서 개발원까지 실습이나 자원봉사를 하러 왔는지 필자는 이해가 잘 안되었다. 하는 수 없이 부산 개발원으로 전화를 해서 나사렛대학교에서 실습이나 자원봉사를 하러 온 적이 있느냐고 문의를 했다. 몇 번이나 전화를 바꾸었지만 최종혁 학생이 다녔을 2000년 무렵의 선생은 남아 있는 사람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튼 여름방학이 되고 최종혁 씨는 C의 집이 있는 평택으로 같이 놀러 갔다고 한다. 며칠 동안 C와 놀다가 기차를 탔는데 기차에서 쓰려졌다.

“기차에서 쓰러져 내렸는데 대전이었습니다.”

대전역에서 119를 불러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갔다. 부산에서 어머니가 그가 쓰러졌다는 얘기를 듣고 응급차를 타고 왔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응급구조단 차를 타고 부산으로 와서 B병원에서 감마나이프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부산기능경기대회가 있었는데 출전했지만 떨어졌다. 개발원 전자과를 졸업해도 취업은 잘되지 않았다. 개발원의 입학자격은 ‘나이는 만 18세 이상 69세 이하(입학년 기준), 자력으로 단체생활과 직업교육 훈련이 가능한 장애인복지법에 의한 등록 장애인’이면 가능했다.

그래서 컴퓨터응용분야로 과를 옮겨 캐드를 공부했다. 캐드(CAD)란 컴퓨터 지원 설계(Computer Aided Design)의 약자다. 컴퓨터에 기억되어 있는 설계정보를 그래픽 디스플레이 장치로 추출하여 화면을 보면서 설계하는 것으로 곡면이 혼합된 복잡한 형상의 입체도 비교적 간단히 설계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시 2년을 졸업하고 김해에 있는 장난감 공장에 취업을 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부산지사를 통해 취업했는데 전자나 캐드하고는 별 관련이 없었다. 장난감을 조립해서 수출하는 회사였는데 그는 공장에서 완성된 장난감을 검사했다. 직원들은 대부분이 장애인이었다.

그의 집은 부산교육대학 근처였는데 교대에서 버스를 타고 김해까지 다녔다. 고되고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멀리까지 다니다보니 너무 힘들어서 지쳤나 봅니다.”

채 1년도 되기 전에 쓰러졌다. 그는 119로 B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B병원에서 수술을 못했습니다.”

아니 왜 수술을 못했을까.

“엄마가 의사하고 싸웠습니다.”

지난번에 쓰러져서 수술 했을 때 의사는 이제 괜찮다고 한 모양인데 엄마는 왜 또 이러냐며 의사와 싸웠다는 것이다. 결국 B병원에서 수술을 못하고 D병원으로 옮겨서 감마나이프 수술을 했다. 그 때가 26살이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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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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