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가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 하늘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이 시는 나희덕 시인의 ‘귀뚜라미’다. 여름이었다. 염천 뙤약볕 아래 매미 소리 하늘을 찌는데 아직 가을이 오지 않아서 귀뚜라미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고 귀뚜르르 찌뚜르르 타전해 보지만 과연 그 마음을 누가 알아줄거나.

최종혁 씨. ⓒ이복남

귀뚜라미는 아직은 가을이 오지 않았으므로 몸을 움츠리고 자세를 낮추고 작은 울음소리 밖에 낼 수가 없다. 그러나 가을이 오면 자신의 울음소리가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는 노래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귀뚜라미가 귀뚜르르 찌찌르르 우렁차게 노래 할 가을은 과연 언제쯤 오려나.

최종혁(1982년생) 씨는 부산 가야동에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하나 있고 아래 동생인데 어머니는 전업주부이고 아버지는 그림이나 거울 등 액자가게를 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부모님은 가난했지만 그럭저럭 밥은 먹고 살만한 평범한 가정이었다.

살림밑천이라는 첫딸을 낳았고 그는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서 자랄 때까지 별 문제는 없었다. 보통의 아이들처럼 먹고 자고 또래 아이들과 싸우기도 하고 어울리면서 그렇게 자랐다. 부모님은 항상 ‘정직하게 살고,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그리고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를 늘 강조하셨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의 개성을 살릴 수 있도록 구속하시지 않고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에게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있게끔 말없이 지원해 주셨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달셋방에 산 것 같은데 여러 번 이사를 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범일동으로 이사를 해서 범일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짹짹 삐약삐약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1학년이 되고 2학년이 되었다.

“3학년 여름쯤에 쓰려졌습니다.”

그는 교실에서 수업 중에 픽 쓰러졌다는 것이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놀라서 양호실로 옮겼다는데 입에 거품을 물더란다.

어느 여행지에서. ⓒ이복남

어머니가 오고 119가 와서 A병원으로 데려 갔다. A병원에서는 무슨 검사를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왼쪽 뇌가 선천성기형이라고 했다. 그래서 뇌수술을 했다. 수술 후부터 오른쪽 팔과 손 그리고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왔다. 지금도 걸음을 잘 걷지 못하고 오른손과 팔은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

뇌수술을 하고 3학년 2학기부터 다시 학교에 나갔다.

“그 때 꿈이 의사였습니다.”

의사들은 자신처럼 아픈 사람들을 살려 준다는 것이 신기하고 존경스러웠다. ‘나도 커서 다른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의사가 되어야지’ 그의 장래 희망은 의사였다. 의사가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 된다고 했다. 공부가 꼴찌는 아니었지만 상위권도 아니었기에 의사가 되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만 해도 아직은 어렸으므로 그의 장애나 꿈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야 간섭하는 사람은 없었고 부모님의 바람은 ‘튼튼하게만 자라다오’였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는 “정직하게 살고,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스스로에게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자주 말씀 하셨다.

그러나 3학년 겨울부터 의사의 꿈은 사라졌다. 선천성 기형인가 뭔가 하는 것이 재발했던 것이다. 겨울 방학 때라 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힘이 없어졌다.

“엄마 나 갑자기 힘이 없다” 어머니는 놀라서 “왜? 다시 병원 갈까?” 물었다. “응 다시 병원 가자” 그는 어머니와 같이 A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여러 가지 검사를 했는데 재발이라고 했다. 그러나 수술까지는 아니고 약물치료로 가능하다고 했다. 선천성으로 좌뇌에 물이 고여 있어서 계속 약을 먹어야 된다고 했다.

그 때부터 언제 또 재발할 것인지 그는 물론이고 부모님도 노심초사했다. 성적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건강이 우선이니까 공부는 뒷전이었다. 남을 살리는 의사 보다는 자신부터 살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과 업무처리를 하는데 있어서 무리가 없으며,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는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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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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