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원하던 학급반장이 되었으나, 2학년과 3학년은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3학년부터는 매주 토요일마다 학급회의를 하는 것이었다. 10살 아이에게 ‘회의’라는 개념도 생소했지만, 반장이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니 덜컥 겁이 났다. 반장이 되고 첫 토요일이 되어 선생이 반장과 남부반장을 앞으로 나오게 해서 회의를 진행하게 했다.

대구대에서 발표 수업. ⓒ이복남

반장은 교탁 앞에 서서 학생들을 보며 회의를 진행하고, 남부반장은 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을 칠판에 적는 게 기본 역할이었다. 선생님은 그가 안 들린다는 것을 몰랐을까?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담임선생님께 제가 안 들린다고 말씀드렸는데 3학년 때만 해도 약간은 들렸기에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담임선생님도 제가 안 들린다는 것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학급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좋은 의견이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 주세요.’ ‘동의하십니까?’ 등의 내용을 선생이 중간 중간 알려 주어도, 그가 제대로 듣지 못하기 때문에 회의가 원활하게 진행될 리가 없었다. 결국 답답해하신 선생은 그를 자리에 들어가게 하고, 남부반장이 회의를 진행하게 했다. 대신 여부반장이 칠판에 회의의 진행과정을 적게 했다.

“학급회의가 끝나고 선생님이 회의 진행에 관한 작은 책을 주시면서 회의 진행 방법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그 뒤부터는 다시 그가 회의를 진행했지만 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해 미숙하고 답답했던 점이 많았다. 그렇지만 매주 회의를 거듭할수록 그만의 요령과 노하우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몇 주 뒤에는 정말 자신 있게 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학기가 끝나갈 즈음에는 오히려 토요일을 기다리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유럽 가족여행 중 프랑스에서. ⓒ이복남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출석번호를 생일 순으로 정했다. 1~2월의 빠른 생일은 뒤로 가고, 3월 생일인 순서로 번호를 정했는데 3월 6일이 생일인 그는 늘 1번이었다. 그래서 실기시험이나 뭘 하든 출석번호 순서대로 하는 경우에는 항상 먼저 해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시 학력고사 시험을 친 적이 있었다. 첫 교시인 언어영역에는 필기시험 외에 실기시험으로 주어진 글을 읽고 난 뒤에 이어질 내용을 발표했다. 그리고 또 다른 실기시험으로 노래를 부르는 파트도 있었다.

모든 필기시험이 끝나고 실기시험을 치는 시간이 되어 선생님은 1번부터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첫 번째 실기시험은 언어영역으로, 글을 읽고 나서 뒤에 이어질 내용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번으로 앞에 나간 그는, 그 실기시험이 노래를 부르는 시험인 줄 알고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꽃에 앉지 마라~” 라는 노래를 불렀다. 반 아이들이 책상을 두드리고 큰 소리로 웃으며 난리가 났다.

“당연히 저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조용하게 하신 뒤, 큰 소리로 그리고 천천히 설명을 해주셨다. 하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그는 노래를 너무 못 불러서 그런 줄 알고 선생님이 다시 하라고 했을 때 더 큰 소리로 같은 노래를 불렀다. 다시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박장대소했다.

결국 선생님은 그를 자리에 들어가게 하고 2번부터 실기시험을 시작했다. 자리에 들어가서 2번부터 발표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언어영역의 실기시험부터 하는 걸 알게 되었다. 학급반장이었으나 그 때 일로 며칠간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지경으로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는 학교생활에 그렇게 큰 어려움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6년이 지금까지도 저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입학할 때, 반 편성 배치고사를 쳤는데 충분히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다. 특히 그가 입학한 고등학교는 1학년이 총 13개 학급이었는데, 이 중 5~7반은 특설반이고 1~4, 8~13반은 평반이었다. 그는 배치고사 성적이 좋았기에 5~7반 중에서도

가장 좋은 6반에 당당히 배치되었다.

“하지만 내세울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습니다.”

그 뒤로 2·3학년에 올라가면서 반편성에는 내신보다 달마다 치는 모의고사를 더 높게 반영하는데, 그는 언어와 외국어에서 듣기 점수를 따기가 어렵고, 또 학원이나 과외 등으로 심화교육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때 6반에 들어갔지만 그 학급 내에서 늘 꼴찌를 하였고, 2학년부터는 다시 평반에 배치되었다.

강의도 하고 연주도 하고. ⓒ이복남

고등학교 1학년 때 가장 좋은 반에서 공부 잘하는 또래들과 경쟁했지만, 칠판의 글씨도 안 보이고 선생님의 말씀도 못 알아듣는 그는 오직 혼자서 책과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공부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바로 친구들의 그의 장애에 대한 이해였다.

특히 그보다 훨씬 공부를 잘하는 친구조차도, 그가 선생으로부터 혜택이나 특혜를 받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그가 잘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의 이름을 마구 큰 소리로 부르거나 욕을 하기도 했다. 어쩌다 그가 우연히 알아듣거나, 다른 친구가 그걸 알려줘서 그가 항의를 하면, 못 듣는다면서 어떻게 아느냐고 오히려 그에게 대들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동국 선수를 좋아했기에 축구를 정말 하고 싶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체육시간에 축구나 농구를 하게 되면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가 운동을 하더라도 팀워크를 흩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정말 몸이 약했다. 감기에도 잘 걸리고, 학교 체력장에서 팔 굽혀펴기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많이 약한 체력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어려웠던 그는 책을 가까이하여 체육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보다는 시력이 좋았기에 소설 ‘국화꽃향기’를 읽고 울기도 하는 등 감수성이 풍부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글짓기 조기교육을 받았던 덕분에 글을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요즘처럼 심각한 학교폭력이나 왕따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고등학교 시절 깊이 자리 잡은 상처가 많았다.

“나중에 자라서 성인이 된다면 저를 괴롭힌 녀석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니까요.”

고등학교에서는 대학입시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수능으로 점수를 내기가 어려웠던 그는 내신으로 승부를 해야 했다. 그래서 혼자서도 내신만큼은 열심히 공부하여 대구대학교 법학부에 1학기 수시로 합격할 수 있었다.

“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저의 합격발표가 났을 때 울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학년이 올라 갈수록 주변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절망하고 때로는 좌절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직접 말로 할 수 있지만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은 그의 손에 적어주거나 수화, 또는 문자통역을 해야 가능했다. 수화는 언제 어디서 배웠을까.

“대학생이 되면서 장애학생지원센터의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그 때 저를 도와주던 학생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은 손바닥에 적거나 수화나 문자로 다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도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기다리며 인내하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는 것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첼로 독주. ⓒ이복남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 장애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것이 ‘장애’라는 것도 몰랐고, ‘장애’에 대한 인지도 거의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의사선생이랑 부모님이 나누는 대화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도 못했다. 그렇게 초·중·고등학교를 일반 학교로 다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시·청각중복장애 1급으로 등록하였다.

대구대학교에 입학한 뒤에 그가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축구동아리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대구대학교가 장애학생에 대한 지원과 배려가 잘 되어 있는 만큼, 축구동아리에서도 많은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축구뿐만 아니라 체력단련실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며 몸을 만들고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문자통역지원, 활동보조서비스 등을 받으면서 장애로 인해 부족한 부분을 지원받는 것에 대해 알아가고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법학을 전공하면서 인권, 특히 장애인 등 소수자의 권리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저의 법학석사 학위논문의 제목도 ‘소수자 보호의 헌법적 고찰’입니다.”

그는 안도현의 시를 좋아했다. “사람냄새 나는 인간적인 내용의 시가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직접 시를 짓는 것을 좋아했다. 보통 자연이나 인생을 소재로 하여 가끔 시를 짓곤 했다.

다음은 그가 지은 ‘Cello 2’이다

‘비 내리는 창가에

의자를 가져다놓고

첼로를 닦는다.

정성스럽게

창문으로 스며드는

바람을 느끼면서

첼로를 안는다.

사랑스럽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도

첼로를 연주한다.

온 맘 다해.

악보를 외우고

진동을 느끼며

첼로와 소통한다.

열정적으로.

내리는 빗속으로

스며든 바람을 타고

첼로가 노래한다.

아름답게.

보지 못하는 것과

듣지 못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꿈을 위해서는…….’

“시를 쓰는 것 외에 또 다른 취미는 첼로를 켜는 것입니다. 하루 일과 중에서 첼로를 켜는 시간을 가장 좋아하고, 첼로를 켜는 순간을 가장 행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영화 ‘굿바이’에서. ⓒ네이버 영화

듣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첼로를 연주할 수가 있을까?

예전에 우연히 일본 영화 ‘굿바이’를 보았단다. 남자 주인공이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였는데, 오케스트라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해체되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주인공은 고향으로 내려가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는데, 여행 가이드를 구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갔던 곳이 납관사였다.

처음에는 시체를 만지는 것도 무서워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사장님의 정성스러운 손놀림과 열정을 보면서 점차 마음을 열고 적응하게 되었다. 하지만 주인공의 아내와 친구들은 왜 하필 그런 일을 하냐면서 주인공의 곁을 떠났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다. 나중에 고향 친구의 어머님이 운영하는 목욕탕에서 어머님이 장작을 옮기다가 돌아가셨는데, 주인공이 납관을 맡게 되었다. 아내와 친구들이 정성스럽게 고인을 배웅하는 주인공을 보며 결국 주인공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의 기본 주제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만족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행복과 직업에 충실하라는 내용이다.

“저는 이 영화에서 첼로에 주목을 했습니다. 아내는 주인공이 납관사라는 걸 알고 친정으로 가버렸지만 주인공은 그래도 그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내가 없기 때문에 혼자였죠. 납관사라는 일을 하면서 겪는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낄 때마다 주인공은 첼로를 켰습니다. 첼로를 켜며 마음과 영혼을 달래준 것입니다.”

박관찬 씨는 ‘굿바이’를 보면서 첼로에 반해서 첼로를 배웠다고 했다. ‘굿바이’는 필자도 본 영화다. 납관사란 우리말로 장의사라 할 수 있는데 일본과 우리나라는 장례방식이 다르다.

그런데 가끔 외국영화는 물론이고 일본 영화 ‘굿바이’에서도 망자를 화장 시키는 등 치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경우 염이라고 하는데 시신을 깨끗하게 닦고 광목이나 삼베 등의 수의를 입히고, 입에는 불린 쌀을 물리고 아홉 개의 구멍은 솜을 막고 난 다음, 시신은 광목이나 삼베 등으로 꽁꽁 동여맨다. 그래서 시신을 염할 때 가족들이 참관하는 것 외에는 조문객들이 시신을 볼 수는 없다. 시신을 묶는 것은 근육수축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우리도 이제는 장례문화를 바꾸어서 망자도 예쁘게 입히고 아름답게 화장하여 조문객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굿바이’에서 주인공은 죽음에 이르는 여행 가이드를 정성스럽게 하면서 혼자 있을 때는 첼로를 켰다. 그래서 박관찬 씨는 첼로에 몰입했고, 필자는 우리나라와 다른 장례절차에 주목했던 것이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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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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