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운동을 좋아했다. 수업시간에는 체육을 제대로 못했지만 방과 후에는 곧잘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특히 아이들이 축구를 할 때면 언제나 그를 찾았다.

“영선아 니는 꼴키퍼 해라”

그는 꼴키퍼를 했다. 꼴키퍼는 앉아서도 잘 할 수가 있었다.

선수권 선발대회. ⓒ이복남

“어렸을 때 공부는 그런대로 했기에 법관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왜 법관이 되지 못했을까.

“중학생이 되고 보니 장애인은 법관이 못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실의에 빠져 있던 차에,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쓰러졌다. 골수암이라고 했다. 큰누나와 작은 누나는 이미 결혼을 했고 아버지가 병든 어머니를 돌보았다.

“아버지는 충격으로 모자 장사를 잘 못 했던 모양입니다.”

그 틈에 국제시장 아버지의 단골가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가고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다 학원을 다니는데 저는 학원 한 번 못 가봤습니다.”

그것이 못내 아쉽고 원통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돌아 가셨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었다. 엄마가 아파 누워있어도 학교에 갔다 와서 “엄마!” 하고 부르면 “왔나?” 하는 인사가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다.

“제가 장애인이라서 그런지 엄마에게는 특히 시린 손가락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 갔다 와서 엄마가 없는 빈방을 열어 보면 그렇게 쓸쓸하고 가슴이 휑했다.

“그 때 그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가정형편은 점점 더 쪼들렸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빨리 졸업하고 돈을 벌어야지 하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을 해서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그렇게 구체적인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서영선의 색동당의와 삼회장저고리. ⓒ이복남

어영부영 하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날 친구와 술을 한 잔 했다. 친구는 그 자리에 또 다른 친구 A를 데려 왔다.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A가 자기 아버지는 한복을 하는데 꼰대 같은 아버지가 영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투덜거렸다. 한복이라? 왠지 귀가 솔깃했다. 한복을 배우고 싶다 했더니 자기 아버지를 만나 보라며 소개해 주었다.

A의 아버지는 국제시장 한복골목에서 한복점을 하고 있었다.

“한복을 배우고 싶습니다.”

안경진 선생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예, 한 번 해 보고 싶습니다.”

한복을 하려면 손재주도 있어야 되고, 무엇보다도 끈기와 참을성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그곳에는 다른 제자들도 몇 명 있었다. 안 선생님은 끝까지 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바늘 실 골무 가위 등 개인용품들을 챙겨 주셨다. 한복에서 제일 처음에는 무엇을 배울까.

“제일 처음에는 단색저고리 만드는 법을 배우는데 연복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보통의 일반적인 저고리를 배우는데 연복(단색)이라고 했다. 그 다음에는 반회장저고리를 배우는데 반회장은 깃, 끝동, 고름 등 3가지 혹은 2가지 색상이 서로 다를 경우이다. 그리고 삼회장저고리는 깃, 끝동, 고름 외에 곁마기라고 해서 겨드랑이에 다른 색이 들어가는 저고리다.

그밖에 까치저고리(색동저고리) 등을 배운다. 당의는 조선시대 상층신분의 여성들이 입던 결혼예복이다. 앞에 부채꼴로 길게 내려온 섶이 배와 등을 가리는 모양의 저고리인데 요즘은 신부 외에 아이들 한복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럼 치마는 언제 배우나?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지만, 저고리를 할 줄 알면 치마는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치마를 배우지 않았단다. 천은 요즘처럼 사철 한복이 아니라 여름에는 갑사종류나 깨끼적삼을 짓고, 겨울이면 양단이나 공단 등으로 한복을 만들었다.

안 선생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한복 주문도 받았는데 모두가 비싼 수제품이었다. 한복을 배우는 것은 도제형식인데 제자들은 무임금으로 약간의 용돈과 숙식만 제공받고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잘못하면 선생님한테 엄청 혼이 났는데 저는 출퇴근을 했습니다.”

2년 6개월 쯤 지나니까 저고리 만드는 법은 거의 다 배웠다.

“그런데 깃을 잘 못 달았습니다.”

론볼경기장에서. ⓒ이복남

선생은 한복 만드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만 한 번 가르쳐 주고 그 다음부터는 선생이 하는 것을 보고 눈으로 배워야 했다. 그런데 선생이 저고리 깃은 제자들 앞에서는 달지 않았다.

선생이 깃을 달 때는 돌아앉아서 달거나 제자들이 안 보는데서 달았던 것이다. 저고리를 만들어 깃을 달고 동정을 다는 것은 일종의 화룡점정이었다. 2년 6개월 쯤 되었을 때부터 선생이 그가 보는 앞에서 깃을 달았다.

“아하, 선생님이 깃 다는 법을 이렇게 가르쳐 주시는구나 싶었습니다.”

3년이 지났다.

“스승님 이제 하산하겠습니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시간이었다. 무림고수에게 기술을 다 배우고 이제 스승 곁을 떠나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무임금의 도제교육 같은 것은 아무도 안하려 할 겁니다.”

요즘은 오히려 수강료를 내고 한복을 배우는 학원들이 있다고 했다.

그는 스승의 품을 떠나 초량에서 ‘서영선 한복점’을 개업했다.

“그 무렵 일반 기능대회에 나가서 은상을 받았습니다.”

부산에서 은상을 받고 전국대회에 출전했다. 당시만 해도 전국대회는 발 미싱이었다.

“지방대회에서는 모터미싱이라 은상을 받았지만 전국대회에 나가보니 시간에 쫓겼습니다.”

그의 한쪽발로는 두 발로 미싱을 돌리는 비장애인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은 전기미싱이라 그런 일이 없겠지만 그 때는 정말 억울하고 서러웠습니다.”

전국기능대회에서 수상을 하지 못했어도 그의 한복점에는 제법 손님이 많았다. 결혼식이나 돌잔치 등에 친인척들은 주로 한복을 입던 시절이었다.

“제가 한복을 처음 배울 때만 해도 신부는 색동저고리 당의를 주로 입었는데 얼마 지나니까 전통적인 녹의홍상 즉 연두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더니 요즘은 딱히 정해진 색깔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신랑신부 양가부모, 삼촌 숙모 등 보통 한번에 10벌 정도씩 한복을 했다. 저고리는 주로 그가 했지만 치마와 조끼 등은 외주 기술자들이 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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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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