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와서는 교회만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가 없었다. 어릴 때는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지만 딱히 불교를 믿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는 친구 따라 교회를 가보기도 했으나 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술 마시고 담배피고 아가씨도 만나고…….

“병원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선교 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엄청 짓궂게 따지며 사납게 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라고 했다.

“하나님은 형제님을 사랑하십니다.”

2010 밴쿠버 동계패럴림픽. ⓒ이복남

사랑하기는, 날 이렇게 만든 게 사랑이냐? 믿음이 없어서라고 했다. 성경을 보고 예배에 빠지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한동안 짓궂게 굴다가 성경이 너무 어렵고 지루하다고 했다.

“내가 살고 싶다고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어요?”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경은 초신자에겐 어렵고 지루하다며 4대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만 잘 듣고 그대로 믿으라고 했다.

“빨리 퇴원하고 교회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 때문인지 퇴원해서 교회를 다닐 수가 있었다. 집에 있으니 이장이 복지관련 내용을 이것저것 가져 왔다.

“이장님 덕분에 지체 1급으로 장애인등록도 했습니다.”

이장은 금은세공을 가르치는 곳이 있다고 했다. 왠지 금은세공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컴퓨터를 하고 싶은데 당시만 해도 1급 장애인에게 컴퓨터를 가르쳐 주는 곳은 없었다. 그러면서 2~3년이 지나갔다.

이장이 다시 찾아 왔다. 일산장애인직업훈련원에서 컴퓨터를 가르친다고 했다. 1995년 3월에 외삼촌 차에 휠체어를 싣고 일산으로 갔다. 1년 과정의 사무자동화과에 입학했다. 프로그래밍과 포트란, 베이직, 코볼, 기계어 등 다양한 것들을 배웠다.

12월이 되고 졸업이 다가 왔다. 그러나 1급 장애인을 받아 주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부분의 회사는 편의시설이 없어서 1급 장애인을 채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공부하면 뭐하냐. 그는 다시 실의에 빠졌다.

“학교에서 무궁화 전자를 소개해 주더군요.”

2011년 비엔나 국제대회에서 우승. ⓒ이복남

수원에 있는 무궁화전자는 1994년 사회복지법인 무궁화동산이 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을 위해 설립한 삼성전자의 계열사이다. 따라서 직원은 대부분이 장애인들이다.

“처음에는 유무선전화기를 조립했고 나중에는 핸드스틱 청소기를 만들었습니다.”

무궁화전자는 장애인을 위해서 설립한 회사이기에 휠체어를 타고 일하기에도 불편함이 없었다. 기숙사, 식당 등 모든 편의시설이 그 당시에는 국내 장애인 회사 중에서 최고였다.

“하루는 수원시에서 장애인체전에 나갈 선수를 뽑는다면서 나갈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장애인 체전? 별로 관심도 없었고 귀찮기만 했다.

“내가 왜 그런 델 나가냐?”

처음엔 싫다고 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연습부터 체전에 나갈 동안 일당을 다 쳐 주고 우승하면 상금도 있다고 했다. 귀가 솔깃했다. 처음 그에게 주어진 종목은 육상인데 원반던지기와 창던지기로 출전했다.

“처음 출전해서 은메달 3개를 받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의 소속은 경기도(수원시)선수이자 무궁화전자 선수였다. 그러면서 전국체전이 있을 때면 육상선수로 연습을 해서 출전했다.

그러다 우연히 장애인체육대회에서 장애인아이스하키 선수를 만났다. 장애인 아이스하키도 비장애인 아이스하키와 별반 다른 것은 없지만 그 대신 장애인은 썰매 같은 것을 타고 했다.

“처음에는 두 다리가 없는 제가 과연 아이스하키를 할 수 있을까 고민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이스하키를 해 보고 싶었다. 장애인아이스하키는 스케이트 대신 썰매를 이용하는 장애인스포츠로 아이스슬레지하키(Ice Sledge Hockey)라고 한다.

26번 김대중 씨. ⓒ이복남

아이스슬레지하키는 1961년 스웨덴의 스톡홀름 부근의 한 호수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991년 아이스슬레지하키 월드컵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25년간 무패를 자랑하던 스웨덴 팀을 캐나다 팀이 격파하였다.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장애인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98년 7월 우리나라에도 아이스슬레지하키팀이 처음 생겨 2010년 밴쿠버 동계패럴림픽에 처음 출전하여 6위를 했다. 물론 그가 국가대표로 참가한 대회이다.

그는 아이스슬레지하키를 하고 싶어서 10년 쯤 다니던 무궁화전자를 그만두었다. 갑자기 회사를 그만 두면 생계는 어쩌려고?

“퇴사 하면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아이스슬레지하키팀이 없었다. 서울에 연세이글스팀, 경기엔 삼육팀이 있었고, 얼마 뒤 평창올림픽 유치를 위해 강원도청팀이 창단이 되어 국내엔 3팀이 전부였다.

각 시도에 장애인체육회가 설립 되고 경기도장애인아이스하키협회가 설립되어 경기도장애인체육회 가맹단체가 되었다. 당시 대한장애인아이스하키협회 회장인 남경필 의원의 도움으로 이승철 경기도의원이 경기도 회장을 맡아 주어서 그는 사무국장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스하키는 판코트(링크)에서 골키퍼(골리) 1명과 선수 5명이 한 팀이 되어 작은 원반 모양의 공인 퍽(puck)을 상대편 골에 쳐 넣는 경기다.

“처음에는 썰매와 몸이 맞지 않아서 얼음판에서 나뒹굴기도 많이 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다는데 그럼에도 그는 아이스슬레지하키의 매력에 푹 빠졌다. 장애인아이스하키가 장애인스포츠 중 가장 스릴과 짜릿함이 넘치는 스포츠란다. 격렬한 몸싸움이 있고 팀플레이로 이뤄지는 등 동계장애인올림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라는 것이다.

김대중 씨 가족. ⓒ이복남

2010년 밴쿠버 동계패럴림픽을 앞두고 출전권을 얻기 위해 멀리 스웨덴 말뫼까지 가서 경기를 펼쳤다. 말뫼에서 치러진 예선전에서 동계패럴림픽 출전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밴쿠버 동계패럴림픽에서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첫 출전에서 세계 6위라는 대단한 성적을 세웠다. 그러면서 운동을 좀 더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사이버대학 체육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아이스슬레지하키를 할 때 등번호가 26이다. 26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병원에 있을 때 하루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지만 의사가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퇴원할 날을 학수고대 하면서 열심히 재활을 했다. 드디어 의사가 퇴원해도 좋다고 했다.

“정확히 4개월 26일만인데 그래서 제게 26이라는 숫자는 특별합니다.”

아이스하키를 하는데 있어서 대상이나 조건은 없을까.

“특별한 제한이나 조건은 없지만 손에 마비 등의 장애만 없으면 됩니다.”

손에 마비 등의 장애가 있으면 스틱을 잡는데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이스하키 선수로 있으면서 국립재활원에서 장애예방강사로 활동했다. 2007년 대전유성관광호텔에서 장애예방강사 워크숍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만난 사람이 아내 이찬숙(1978년) 씨다.

이찬숙 씨도 지체장애 1급이다. 고향은 전남 영암인데 분식점을 운영하다 오토바이 사고로 경추를 다쳤단다. 당시 이찬숙 씨는 김해 장유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가 김해로 이찬숙씨를 만나러 자주 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덜컥 임신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반대를 했다. 이찬숙 씨 어머니도 반대를 했다. 상대의 장애가 너무 중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가졌는데 어쩌겠습니다.”

2017년 제14회 전국동계체전. ⓒ이복남

결국 그는 이찬숙 씨와 결혼을 했고 그리고 김해로 내려 왔다. 그는 결혼을 하면서 수급자에서는 벗어났다. 현재는 김해에 살면서 구인구직 회사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구인구직자를 중개하는 일이었다. 슬하에는 세 아이도 있다.

경기가 있을 때면 부산장애인체육회 소속으로 아이스슬레지하키팀으로 출전한다. 얼마 전에 끝난 2017년 제14회 장애인동계체전에도 출전했으나 아이스슬레지하키는 4등을 했다. 그리고 부산도 전체 순위에서 4위를 했다.

“육상은 개인종목이라 혼자서 했는데 장애인아이스하키는 팀플레이라서 팀워크도 맞춰야 합니다.”

장애인들은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적은데 아이스하키를 하면서 친구도 많이 사귀고 운동뿐만 아니라 사는 데 필요한 정보도 얻고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었단다.

“가족이 나에게 원동력이라면, 스포츠는 힘들고 어려운 현실에서 살아가는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애인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장애인이라는 것을 표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무엇 무엇은 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과 지금 우리가 부족한 것만 요구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가 알지 못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그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자신도 오래 보아야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풀꽃처럼…….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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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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