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문 나무막대로 자판을 눌러 글을 써나가는 소설가 이서진. ⓒ이서진

19세 소녀를 덮친 사고

위로 딸 넷, 아래로 아들 둘인 7남매 집안에 다섯째인 이윤자는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에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재수라는 시련기를 보내면서도 꿈이 많던 시절이라서 힘든 줄 몰랐다.

고지가 바로 눈앞에 보였기에 더 부지런을 떨었다. 85년 11월 초 학력고사를 이틀 앞두고 도서관에 가려고 새벽 6시에 집을 나섰는데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경추 3, 4번을 다치는 대형사고였다. 병원 생활만 2년 6개월 동안 했다. 목 아래는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이 마비되어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곧 일어나게 될 거라고 믿었어요. 식구들이 모두 쉬쉬하고 숨겨서 사고난 지 일 년이 넘도록 제 몸 상태를 제대로 몰랐어요.”

그녀는 병원 생활이 오래 지속되자 직접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물어보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휠체어를 밀고 재활의국을 찾아갔다.

“그때가 사월이었어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병원 앞마당을 질러가는데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너무도 아름다워 제 처지도 잊고 도취됐죠. 담당 의사를 만나 ‘사실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이 상태로는 더 나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일 뿐 다른 해결책은 없다’는 말을 하더군요. 병실로 가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이번에는 마당의 벚꽃이 그렇게 잔혹해 보일 수가 없었어요.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서 눈이 붓도록 펑펑 울었어요.”

척수장애인은 팔다리만 마비되는 것이 아니라 호흡곤란, 방광 염증, 욕창, 혈액순환 장애 등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시달리며 살아야 해서 이런저런 치료가 필요했지만 윤자는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서 치료도 잘 받지 않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녀는 혹여 딸이 들을까 소리를 죽여 가며 밤새 울던 어머니를 보고 비로소 장애를 받아들였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책을 잡았다. 하루 15시간씩 책을 읽었다. 독서는 퇴원 후 집에 가서도 계속 이어졌다.

결혼과 육아

1993년 일정 학점을 취득하면 학위를 주는 독학사 과정에 등록해서 공부를 하던 중 95년 PC 통신을 하며 그녀보다 두 살 위인 공학도 남자를 만났다. 이윤자 31세, 이현수 33세로 인생에 대해 진지한 시기였다.

“하이텔통신 ‘두리하나’에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제목으로 간략하게 제 소개를 적은 프로필을 남겼어요. 그런데 얼마 후 남편이 메일을 보내왔죠. 제가 장애인인줄 모르고 호감을 가지는 것 같아서 몇 번 메일을 주고 받다 남편에게 사실을 밝혔어요.”

하지만 지금의 남편인 이현수는 그녀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오프라인에서 만나자.’고 더욱 적극적 이었다. 그와의 만남이 부담스러웠던 그녀는 그를 피했지만 광주에 살던 남편은 주말에 올라와서 컴퓨터를 가르쳐 주었다.

“처음엔 토요일에만 왔는데 언젠가부터는 토요일에 와서 남동생 방에서 자고 일요일까지 놀다가 갔어요. 제게 컴퓨터를 가르쳐 주고 컴퓨터 공부가 끝나면 초등학생인 조카의 공부를 봐주겠다고 제안해서 또 오고….”

부모를 일찍 여의고 누나와 외롭게 자란 이현수는 이윤자 집안의 화목한 분위기에 쉽게 젖어들었고 그해 가을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하루는 함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남편이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어요. 저는 ‘뭘 어떻게 생각하느냐, 결혼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말했죠. 남편은 ‘남녀가 만나서 서로 좋으면 가정을 갖는 것이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느냐.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쪽으로 생각해 보라.’고 했어요.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많이 떨렸어요.”

결혼을 완강히 거부하는 그녀를 ‘사랑은 수학이 아니다. 주기만 할 수도, 또 받기만 할 수도 있는 것이 사랑이다.’라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시집 식구들도 남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마침내 96년 6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승낙을 하며 남편에게 아이를 못 낳을 수도 있다고 말했어요. 제 몸으로는 아이를 낳기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바로 아기가 생겼어요. 임신 사실을 알고 남편은 뛸 듯이 기뻐했지만 저는 걱정이 앞섰어요. 재활의학과를 찾아가 상의를 했더니 제왕절개하면 아이를 낳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정말 하늘에 감사했어요.”

모두가 산모가 위험할까 봐 걱정했지만 남편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기에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임신 8개월에 제왕절개로 건강한 아들이 태어났다. 그는 임신 후에도 공부를 계속해 97년 2월 독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며칠 후 아들 주빈이를 낳았다.

남편은 아기가 태어난 후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상가에 컴퓨터 부품 매장을 차렸다. 아내와 아이가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달려오기 위해서다.

“항상 남편에게 미안해요. 바깥일만 하기에도 바쁘고 피곤한데 집에 와서도 편안히 쉬지를 못하고 저와 아이를 챙기는 걸 보면 안쓰러울 때가 많아요. 특히 늦은 저녁 혼자서 냉장고 열고 반찬 꺼내고 찌개를 데워 밥 먹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그는 아들에게도 미안한 것이 많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어려서부터 모든 일을 스스로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제7회 김만중문학상 시상식에서. ⓒ이서진

글쓰기 시작

그녀는 주빈이가 다섯 살 무렵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면서부터 정신적·육체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기 때문이다.

“남편이 ‘당신은 문학을 하면 잘할 거야.’ 하고 늘 격려해 줬어요. 작가로서는 늦깎이인 셈이죠. 하지만 신체적 장애가 작품 세계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진 않아요. 앞으로도 살아 가며 겪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소설로 써 보고 싶었어요.”

스토리는 머리에 가득한데 그것을 문자로 쓰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의 열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자판을 누를 힘이 쥐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젓가락처럼 생긴 25㎝ 남짓한 나무막대를 입에 물었다. 불편한 왼손을 마우스에 걸치고 입에 문 막대로 천천히 마우스를 움직이다 클릭을 하니 한글 프로그램이 열렸다. 이어 입에 문 막대로 자음 한 개씩, 모음 한 개씩을 번갈아 눌러 컴퓨터 화면에 글자들을 새겨 나갔다. 그녀가 원고를 쓰는 모습은 신기에 가깝다.

당당한 소설가로 “아이 낳고 기르며 평범한 결혼 생활을 하던 2001년 어느 날 남편이 신문에 실린 ‘장애인문학상 공고’를 가져오더니, 한번 응모해 보라더군요.”

남편의 설득에 넘어가 쓴 그의 첫 작품 단편소설 <연명>은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에서 가작을 수상했다.

“처음 쓴 작품으로 상을 받고 나니 신기했어요. 그러면서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2003년 <웨딩부케>는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최고의 상인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으로 선정되었고, 2005년에는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중편소설 부문에 당선되었다.

“이번에 당선된 작품은 2004년에 쓴 거예요. 남편과 현대미술관에 갔다가 세계평화기획전을 둘러보며 모티프를 얻었죠.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주빈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낮에는 거의 글을 못 쓰고 밤 10시 정도에 시작해서 새벽 2, 3시까지 작업을 했어요.”

원고지 3백 장이 조금 넘는 당선작 <우리들의 숨은 이야기>는 두 남녀가 베트남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3일을 함께 여행하고 헤어진 후 한국의 한 미술관에서 7년 만에 재회하는 이야 기를 다룬 소설이다. 심사위원 전원으로부터 ‘문체가 세련됐고 구성에 안정감이 있다.’는 호평을 받았다.

자신감이 생긴 이윤자는 일반문학상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필명 이서진을 사용하였다. 진짜 작가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실패도 많았지만 한 편 한 편이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글을 쓸수록 더욱 단단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2010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전문가 과정에 입학하여 일주일에 2회 수업을 받았다. 배울수록 부족한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설의 매력에 빨려 들어갔다.

2011년 단편 <와륵>으로 신라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월간문학』에 등단하였고, 단편 <다락방 남자>로 제8회 동서문학상, 중편 <그리자벨라를 위하여>로 제1회 천강문학상, 그리고 중편 <강변에 서다>로 제15회 심훈문학상을 연달아 수상하였다.

심훈문학상 당선작 <강변에 서다>는 번역과 시간강사 일을 하며 살아가는 한 부부의 위태로운 삶을 그린 소설로, 심사위원들로부터 ‘우리 시대가 이야기해야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다뤘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녀가 금상을 수상한 제7회 김만중 문학상은 「구운몽」 등으로 우리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서포 김만중의 업적을 기리고, 유배문학을 전승보전하자는 취지로 그의 유배지인 남해군에서 2010년 제정한 문학상이다.

‘응모작 178편 중 단연 수작이자 발군작으로 어렵지 않게 <마지막 메이크업>을 수상작으로 결정한다.’라고 심사위원들은 평했다. 응모를 할 때 장애를 밝히지 않기 때문에 입으로 젓가락을 물고 자판의 자음과 모음을 한 획 한 획 찍어서 장편을 완성했다는 것을 안다면 심사위원들이 기절했을 것이다. 당선작 <마지막 메이크업>은 그녀의 이름을 달고 출간된 단행본으로는 첫 책이다. 

제7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서진

조력자들

경기도 안산에 있는 그의 집에는 아파트 단지에 사는 언니들이 수시로 와서 그녀를 도와준다. 그녀는 세수는커녕 밥 한 숟가락, 귤 한 조각도 혼자의 힘으로는 들지도, 까먹지도 못하지만 언니들 네 명이 있어 집안 살림이 잘 돌아간다.

남편의 역할은 도서관이나 서점을 돌아다니며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다. 남편이 모아준 자료에 자신의 영감을 보태 작품을 생산해 냈다. 시상식 날 남편이 꽃다발을 들고 기뻐하는 모습에 가슴이 찡했다.

엄마의 영향일까? 문학청년을 꿈꾸는 아들은 「백석시집」을 꼭 옆구리에 끼고 다니더니 결국 모대학 문예창착과에 입학했다.

아이들 친구인 시우아빠는 그녀의 맹렬한 독자이다. 주빈이 엄마가 책을 발간하여 지인들에게 선물할 때 자필 사인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낙관을 만들어 선물하였다. 이서진이라는 이름 앞에 ‘一生香’이라는 별호를 달아 주었다. 평생 향기가 난다는 뜻으로 이서진은 문학 활동에 신체적 장애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 주었다. 언젠가는 호흡이 긴 가야의 역사를 다룬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목표를 묻자 ‘작가로서 거대한 목표는 없어요. 조근조근 소설을 써 가고 싶을 뿐입니다.’라며 소박한 꿈을 밝혔다. 2018년 6월에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가장 까다로운 뇌수술을 받았다. 그 후 ‘당분간 2~3년은 글을 쉬어야지 싶습니다.’라는 짧은 메일로 절필을 알렸다.

치열하게 사는 동안 이서진 작가도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1966년생으로 올해 56세면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기에 그녀가 건강하여 새 작품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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