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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신의 지킨 시각장애인 의병 ‘유팽로’

나라와 백성 위해 전쟁터로 나가는 용맹함 보여 줘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9-03-15 14:35:00
유팽로 장군 관련 유적지 도산사 ⓒ구글 캡처 에이블포토로 보기 유팽로 장군 관련 유적지 도산사 ⓒ구글 캡처
월파(月坡) 유팽로(柳彭老,?~1592)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인물로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유팽로는 어린 시절 을사사화 때 사직하고 합강촌에 낙향하여 은둔했던 아버지 유경안(柳景顔)에게 직접 글을 배웠는데, 문장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한국문화콘텐츠닷컴, 유팽로 편.)

다음은 그가 6세에 지었다는 시다.(한국문화콘텐츠닷컴, 유팽로 편.)
前有合江水 앞에는 합강물이 있고
後有玉出山 뒤에는 옥출산이 있으니
願借江山壽 원컨대 강과 산의 수명을 빌려
但欲悅親顔 어버이의 얼굴을 기쁘게 받들었으면

그는 선조 12년(157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9년 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고향인 전라도 옥과현(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에서 살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팽로 편.)

어느 날 한 사람이 유팽로에게 왜 관직에 나아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벼슬을 하지 않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억지로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파리나 개처럼 작은 이익에 악착스레 구는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신경, 『재조번방지』, 민족문화추진회(1973), 『대동야승』 9, 민족문화추진회, 151~154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팽로는 양대박, 안영 등과 함께 궐기하여, 피난민 500명과 집에서 부리던 종 100여 명을 이끌고 담양에서 고경명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임진왜란 발생 이후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곽재우로 알려져 있지만 이보다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유팽로였다.(한국문화콘텐츠닷컴, 유팽로 편.)

그는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고경명의 휘하에 들어가 종사관이 되었는데, 이때 ‘각 도에 보낸 통문’이라는 격문을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라도 의병대장 장하사 성균관 학유 유팽로 등은 삼가 두 번 절하고 충청, 경기, 황해, 평안 네 도의 각 읍 수령 및 향교의 당장 유사에게 통고한다.

섬 오랑캐가 공손치 못하여 임금께서 멀리 파천길을 떠나시고 칠묘는 잿더미가 되고 만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이야말로 고금에 없는 큰 변고라, 충신의사가 목숨을 바쳐 국가에 보답할 시기이다.

그런데 각 도의 신하들이 관망만 하고 있으며, 군사를 징발하라는 교서가 내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한 사람도 북으로 머리를 돌려 적에게 죽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오늘날 사대부는 가히 조정을 버린 셈이다.

우리 호남은 본래 군사가 강하다 칭하는데 근왕의 군사가 겨우 금강에 당도하자 도성이 함락당하여 유언비어가 멀리 전파되니, 소위 주장은 미처 중의를 들어 보지도 않고 별안간 전령하여 진을 파하라 하므로 십만의 군중이 까닭 없이 헛걸음만 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일도의 인심이 흉흉하여 마치 거센 물결에 밀리는 것 같았다.

그다음 두 번째 군사를 일으킬 적에는 어리석은 백성이라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하니, 근심이 실로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다행히 사직의 복과 조종의 영을 힘입어 흩어진 군사가 날로 모여들어서 군성이 크게 떨치므로 거의 궁금을 청소하고 어가를 받들어 모시리라 여겼는데, 사람의 꾀가 잘못되고 하늘이 화를 준 것을 뉘우치지 아니하여 몇 안 되는 적을 만나자 대군이 또 무너졌다. 그래서 무기와 양식을 버리는 바람에 도리어 적을 유리하게 만든 셈이 되고 말았다.

아! 우리나라 역대 임금께서 수백 년을 두고 길러내셨건만 어찌 적개심을 가진 한낱의 신하가 없단 말인가. 공론이 아래층에 있는 것은 옛사람이 이미 불행한 일이라 칭하였으니, 초야에 창의하는 것 역시 상책이 아님을 알지만 군부가 어려운 고비에 처했는데 딴것을 돌아볼 겨를이 있겠는가.

거듭 생각하면 영남과 양호는 실로 우리나라의 근본이라 할 수 있거니와, 영남으로 말하면 의병이 일어난다 해도 적의 소굴이 가로막혀 있는 이상 곧장 서울에 도달하여 왕실에 충성을 바치기는 어려울 것이며, 호서 역시 천리의 지방이라 어찌 의기 있는 남아가 없으리오마는 죽이고 약탈하는 적의 위세에 겁내어 자신을 구출할 겨를조차 없을 것인즉 오늘날 조야에서 믿는 것은 오직 호남 한 도에 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우리 막부는 만 번 죽음을 각오하고 한 지방의 군중을 고동시키자 민심은 조국을 생각하여 열사가 구름 모이듯 하는지라, 장차 북도로 길게 몰아쳐 요얼(妖孼)을 쓸어 버릴 생각이나 천릿길에 군량을 운반하는 것은 자력으로 판출하기 어려우니 만약 의를 좋아하는 여러분이 힘을 모아 서로 부조하지 않는다면 비상한 큰 공을 어찌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룰 수 있겠는가.

오늘날 국내 어느 곳을 막론하고 왕의 땅이 아닌 것 없으니 양호의 군사를 가지면 족히 부흥시킬 수 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함께 순국의 뜻을 분발하고 지균의 의를 본받아서 각기 속미를 염출하여 군량을 보조해 준다면, 저 맹자의 이른바 ‘능히 말만이라도 양·묵(양주와 묵적)을 막는 자는 역시 성인의 무리다.’라는 그 말씀이 아니겠는가.

또 생각하면 산길은 험하고 평탄한 데가 있고 도로는 바로 가고 돌아가는 데가 있으므로 향병의 지도에 의뢰하지 않으면 역시 창졸간의 곤란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과연 지방민들을 모집하여 우리 군세를 확장시켜 준다면 비단 종묘사직의 치욕을 쾌히 씻을 뿐 아니라 적의 칼날에 넘어진 부자 형제들 역시 지하에서 눈을 감게 될 것이다.

오늘의 일은 비록 어리석은 남자나 여자들도 역시 다 마음이 쓰라리고 머리가 아픈데, 하물며 각 읍의 수재야 모두 국가의 은혜를 받았거늘 어찌 차마 앉아서 진척을 보듯이 하겠는가. 반드시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옛말에 ‘그 사람의 밥을 먹은 자는 그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하였으니, 만약 소문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참전하는 자가 있다면 입에 피를 바르고 서로 맹세하여 함께 나랏일에 힘쓸 것이며, 혹은 군량과 무기만이라도 진중에 수송해 준다면 역시 일조가 되리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해서나 관서는 비록 도로가 불통이라 하지만 각기 믿을 만한 사람을 모집해서 샛길로 나가 차례차례 서로 전하여 일각이라도 지체 없이 한다면 원근이 듣고서 장차 믿어 걱정하지 않을 것이니, 이 통문이 도착하는 그날로 여러 향고의 당장·유자는 각기 한 통씩을 등사해서 경내 인사에게 전달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하기를 바라는 바이다.(고경명·고재열 역(1978), 『국역 정기록』, 충열공제봉고경명선생기념사업회. 의마총)

유팽로 장군 관련 유적지 의마총 ⓒ구글 캡쳐 에이블포토로 보기 유팽로 장군 관련 유적지 의마총 ⓒ구글 캡쳐
유팽로가 속해 있던 고경명의 군사는 한양으로 북상하려 했지만 충청도 금산에 왜군이 침입 하여 군수 권종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고경명은 군사를 이끌고 금산으로 향했으나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했던 의병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유팽로는 이를 이유로 하여 금산으로 군사를 돌리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들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많은 이들이 희생되고 말았다.

유팽로는 이 싸움에서 날쌘 말 덕택에 금세 적장지에서 벗어났으나 의병 대장이었던 고경명은 안타깝게도 달아나지 못했다.

이에 유팽로는 다시 말고삐를 돌려 고경명에게로 가고자 했다. 하지만 유팽로의 종이 다시 돌아가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이를 만류하였다. 그러나 유팽로는 이를 뿌리치고 고경명에게로 돌아가 그와 생사를 함께하였다. 고경명과 목숨을 걸고 적지로 돌아온 유팽로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종사관 유팽로는 건강한 말을 타고 먼저 나와서 그 종에게 묻기를, “대장이 포위망을 벗어났느냐?” 하니,

종은 답하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고 하였다. 팽로는 즉시 고삐를 돌려 말을 채찍질하여 선친을 난군 속에서 시종하니, 선친은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먼저 나가지 않는가?” 하자, 유군은 대답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구차히 살려 하겠습니까?”
하고, 여러 번 말해도 선뜻 가지 아니하고 종시 보호했던 것이다.(편집부(2008), 『(국역) 패관서 대동야승』 제26권, 한국학술정보, 476면.)

유팽로는 왜군이 던져 날아온 칼날로부터 고경명을 보호하다 그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유팽로가 태어난 해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운명을 달리했던 때 의 나이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후에 유팽로의 이러한 충심은 조정에 알려지게 되어 대사간에 추증되었으며, 광주 포충사와 금산 종용당에 제향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팽로 편.)

전쟁이 발발하면 어린이와 노인, 여자와 함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전쟁터로 내보내지 않는다. 이것은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한쪽 눈이 보이지 않으면 시야각이 좁아져 일상생활을 할 때도 불편한 상황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팽로는 자신의 장애에 굴하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전쟁터로 직접 걸어 나가는 용맹함을 보여 주었다. 물론 유팽로의 이러한 행동은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행한 모든 일들은 충분히 박수받아 마땅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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