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이원형 ⓒ이원형

이원형은 1946년에 태어났다. 함북 청진에서 정어리기름 빼는 공장을 운영하다가 한국 전쟁 전에 서울 신당동 우체국장을 지낸 그의 부친은 부인과 5남매를 두고 1·4 후퇴 때 혼자 북으로 갔다.

그때가 그의 나이 5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저 아버지 때문에 빨갱이 가족이 되었다는 울분만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끌려가 조사를 받으셔야 해서 그의 형제들은 대구 외삼촌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어머니는 배운 사람이라서 오산비행장에서 통역 일을 해서 돈을 보내주었다. 그러다 어머니는 미군 건축가를 만나 재혼했다. 미국인 남편이 본국으로 철수할 때 어머니는 그를 따라갔다. 그때 이원형 나이 12살이었다.

어머니는 미국에 가기 위해 이름을 개명을 하는 바람에 법률적으론 친자(親子) 관계도 끊어졌다. 어머니는 미국으로 가서 자리를 잡은 후 자식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새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급사하는 바람에 미국행은 좌절되었다.

다행히 새아버지가 마련해 준 광화문 집에서 살며, 이태원 집은 미군들에게 세를 주어 셋돈을 받아 5남매의 생활비로 썼다.

이원형의 왼쪽 다리는 가늘고 짧다. 세 살 때 걸린 소아마비가 다리를 그리 만들더니 엉덩이와 허리까지 뒤둥그러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뼈까지 틀어졌다. 그의 오른쪽 날갯죽지 뼈는 낙타 육봉(肉峰)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누구와 의논할 사람도 없기에 그는 자신의 몸이 뒤틀어지고 있는 것을 혼자서 조용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등뼈가 휘기 전까지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했는데 등뼈가 휘고 나니 걷는 것이 편안해졌다.

이원형 작품1 ⓒ이원형

미술과의 만남

서울중학교에 응시를 해 필기시험에 합격을 했지만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한 해를 쉬고 다음해에 휘문중학교로 갔다. 누나가 경기여고, 서울대 출신이라서 경기고 진학을 권했는데 중학교 입시 때와 같은 꼴이 될까 봐 휘문고로 진학했다.

휘문고 시절에 많은 경험을 했다. 3년 내내 여름방학 때마다 무전여행을 다녔다. 친구들이 잘 걷지도 못하는 원형을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을 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서울의대 입시에서도 역시 장애 때문에 낙방하였다.

공부를 아무리 잘 해도 팬티만 입혀 놓고 미래 일꾼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려내는 신체검사라는 제도 때문에 고배를 마셔야 하는 현실 속에서 그는 의대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그는 대학에 가서 뭘 전공해서 졸업 후 어디에 취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울 수 없었다. 그저 대학은 안 갈 수 없으니 영어라도 배우자는 생각에 외국어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하였다.

1학기 마치고 휴학했다. 재수를 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성모병원 정형외과 의사들이 최신 척추교정기술을 도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반강제로 그를 입원 시켰다. 수술을 하고 회복하는데 2년이 걸린다고 의사는 진단하였다.

장애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완벽한 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굽은 뼈를 펴는데 2년이란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발목부터 목까지 통깁스를 하고 지내야 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마치 모르모트(기니피그, 좁은 땅굴에서 사는 쥐) 처럼 살기는 싫었다.

“그래서 친구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도망쳤지요. 친구 부모님이 사시는 영종도에서 두 달 동안 숨어 지냈어요.” 이원형이 웃으며 말했다. 1968년 복학한 뒤 인생이 바뀌었다.

한양대 건축과에 다니는 고교 동창이 데생을 해야 하는데 학원에 여자가 많아 혼자 가기 민망하니 같이 다니자고 하기에 그냥 함께 다녔는데 재미가 있어서 친구가 학원을 그만둔 후에도 이원형은 계속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외대에 미술부를 만들어 전국으로 스케치 여행을 다니면서 미술부를 활성화시켰다. 그는 국전(國展)에도 출품했었는데 제목을 잘못 달아 떨어졌다는 후문을 들었다.

‘인터코스(Intercourse)’라는 전위적인 작품이었는데, 그 단어가 예전엔 ‘섹스’와 동의어로 쓰였었다. 고지식한 심사위원들이 그것을 퇴폐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대학 내내 미술에 푹 빠져 있었다. 미네르바 언덕에서 첫 번째 미술부 전시회를 개최해 박술흠 선생님이 그의 작품을 구입해 주셔서 그 돈으로 미술부 사물함 등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졸업하면 미국에 가서 미술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낯선 땅에서 꿈을 찾다

그는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 땅을 밟았다. 돈이 없어서 흑인들이 사는 월세 30달러짜리 집을 잡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곳에서 장애는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는 페퍼다인대에 입학하여 장학금을 받으며 미술의 기초부터 시작하였다. 부족한 돈은 광고디자인 아르바이트나 토마스 브라더스 맵이라는 지도 제작사에서 지도를 그리는 일을 하며 충족하였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1976년 마침내 페퍼다인대를 수석 졸업하였다.

이후 오티스라는 명문 미술대학원에 합격하였는데 등록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대학원을 포기하였다. 그때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가정이 있었기 때문에 당장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부터 해야 했다. 그는 가족들을 위해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미술 한답시고 보헤미안 생활을 했기에 친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쳐들어와서 술을 마시고 냉장고도 싹 비우는 그런 생활을 부인이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캐나다로 가서 밴쿠버 브리티시 컬럼비아대(UBC) 상과대학원에 입학하였다.

또다시 수석 졸업하고 들로이트 회계법인에서 3년간 인턴 생활을 했다. 정말 힘들었던 시간을 보내고 1983년 캐나다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당시 캐나다는 공인회계사가 부족했기에 스카우트 제의가 많이 들어왔다. 그는 인턴을 마치고 토론토로 가서 회계법인을 만들어 돈을 벌기 시작했다.

다시 예술가로

생활이 안정되자 다시 미술병이 도졌다. 낮에는 회계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스튜디오에 서 작품을 했다. 부인은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그림에 빠져드니 옛 악몽이 떠올랐던 것이다.

부인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였고, 그 역시 교회를 다니며 성가대에 청년부 교사까지 하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삶에 안착하려 노력했지만,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는 1996년 어느 날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집을 나오고 말았다.

그것이 이혼이라는 결과가 될 것이란 생각 없이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길을 가고 싶었다. 2002년 이원형은 존슨 스테이트 칼리지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때가 57살이었다.

미국 버몬트주에 있는 대학인데 1년에 석 달만 합숙하면서 작업하고 월 1회 세미나에만 참석하면 되는 조건이었다. 돈 벌면서 공부하기엔 딱 맞는 조건이었다.

“그때 정말 깊은 고민을 했다. ‘내가 왜 미술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하는 자기 확신이 필요했다. 2주 동안 자연을 헤매며 생각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라고 말이다.”

공부를 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2007년 뉴욕에서 열린 아트 엑스포에 출품하였는데 영국과 미국의 딜러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의 작품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원형 작품2 ⓒ이원형

이원형의 작품 세계

늦은 나이에 다시 미술을 시작하려니 집중이 필요했다. ‘내가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색(色) 감각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나 로댕의 조각보다는 더 잘 만들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조각에서 좋아하는 작가가 그 둘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은 오히려 시스틴 성당 벽화에서 찾아야 하고,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이 유명하지만 진짜 걸작은 ‘칼레의 사람들’이라는 조각이지요.”

조각가 이원형의 작품을 주목한 곳은 영국이다. 아낙네가 시골 뒷간에서 용변 보는 도발적 형상에 매료된 런던 조각공원 ‘The Pride of the Valley Sculpture Park’에서 작품 두 점을 사 갔다. 그 뒤엔 영구보존 조건이 붙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미국, 캐나다, 영국, 싱가포르, 멕시코, 베트남의 조각공원과 대학, 뮤지움에 소장되어 있다.

2010년에는 콩고 독립 50주년 기념으로 라는 작품이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콩고 대통령궁 앞에 설치되었다.

“전 다작을 해요. 1년에 50점 정도를 만드는데 청동은 에디션이 있잖아요. 에디션은 주물로 같은 작품을 여러 개 만들 수 있다는 뜻이지요. 보통 넘버가 10개 이하여야 예술작품으로 분류되는데 전 8개만 만듭니다. 그러니 1년에 작품 오십개를 만들어도 실제론 400개가 나오는 셈이지요.”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예술과 소통하며 인간의 진정한 삶에 대한 질문을 던졌으면 한다.

이원형의 자녀들

그의 아들 크리스는 하버드 의대 재학 중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원 2년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를 받아 졸업했으며, 존스 홉킨스에서도 같은 조건으로 대학원에서 1년을 연구하였다.

하버드 졸업 때는 상위 0.1퍼센트에게 수여하는 졸업생 최고의 영예인 Cum Laude상과 온갖 상들을 모두 받은 수재이다. 의사 시험도 역시 상위 0.1퍼센트로 통과했다.

“아빠, 하버드에서 올해 처음으로 장학금을 수여했는데 외국인으로는 내가 유일하게 받았어.” “축하한다.”

“엄마 크루즈 여행 보내주고 나머지는 모두 학교에 다시 기부했어. 나보다 가난한 학생 주라고….”

“아빠는?”

“생각 안 해 봤는데….”

“…….”

인턴, 레지턴트(UC San Francisco)를 끝내고 병원과 학교에서 남아 달라는 권유를 뿌리친 크리스는 가난한 나라의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세계 곳곳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 가장 약자인 어린이들을 위해 그 나라 정부에 필요한 조언을 해 주는 역할과 어린이들을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서 치료해 주었으며, 하이티의 대지진이나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등 세계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늘 그곳에 있었다.

지금은 CDC(Center for Disease Control)에서 에볼라, 지카 바이러스 등이 발견되면 선두에서 진두지휘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버드 의대 입학 전 그가 아들에게 말했었다.

“돈을 버는 의사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빠와의 약속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1년에 수십만 불을 벌 수 있는 의사를 하지 않고, 돈에 구애받지 않으며 해야 할 일을 멋지게 하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빠의 심정은 어떨까?

딸 유나는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역시 돈을 쫓아 디자인을 하지 않는다. 비영리단체(Non Profit Organization) 만이 그녀의 손님이 될 수 있다.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고 그들을 위한 디자인을 한다.

세계 각지로 강의를 다니며 그들과 함께하는 디자인을, 그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디자인을 위해 늘 고민하며 살고 있는 딸이 자랑스러운 이유이다.

그의 작품은 우뚝우뚝 서 있는 형상이 많다. 머리는 작고 하반신은 우람하다. 작가 자신도 “전 하체(下體)가 튼튼한 걸 좋아해요.”라고 말할 정도이다. 작품 중에 시골 아낙네들을 형상화한게 많은데 그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시골에서 아이에게 젖먹이는 아낙네를 본적이 있어요. 가슴을 드러내지만 전혀 부끄럼을 타지 않는 모습에서 강한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게 ‘파머스 시리즈 (Farmer's Wife Series)’ 입니다.”

그 후 작가는 ‘카수라’ 연작(連作)을 하고 있다.

“카수라는 라틴어로 ‘자르다’라는 의미인데 그건 제가 존슨 스테이트 칼리지에서 ‘들뢰즈 미학 (Deleuzean Aesthetics)’을 전공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들뢰즈 미학이 당시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이 쇠퇴하면서 지금은 주류가 됐어요.”

작가가 자르는 것은 시간인데 시간을 자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작가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만약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올 때 순간적이지만 시간 개념이 바뀌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때 다름을 얘기하는데 그 차이는 ‘같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돈된 세상에서 벗어나면 ‘다름’ 이 ‘반복’되는 걸 느끼지요. 그게 핵심입니다. 작업실을 캐나다, 멕시코, 중국에 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환경이 바뀌면 새 영감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거든요.”

그는 버몬트아트 스튜 디오센터 이사, 캐나다조각협회 이사, 캐나다 토론토스쿨 아트스쿨 이사, 피터 그레이 뮤지움 이사, 네덜란드국제조각협회 자문위원 등 직함이 화려하다.

버몬트아트 스튜디오는 매월 전 세계에서 50명의 예술가들을 초청해 한 달간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예술 활동을 하도록 돕는 곳인데 16명의 이사 가운데 유색인종은 이원형 한 명이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동양을 대표하는 천재적인 조각가일 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남미, 북미 등지에서 활동하고 미학가로 세계 각 대학과 미술관 등에서 강의를 하며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전 참선(參禪)을 합니다. 마음을 정돈하고 잡념을 버린 후엔 마음을 비우려는 그 생각 자체까지 버립니다. 보통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작업하는데 그 시간 동안 흐름을 깨트리지 않지요.”

이 말에서 그의 예술은 숭고한 창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원형 작품3 ⓒ이원형

대한민국을 위해

지금의 부인 이현주는 그와 24살 차이가 나는 조각가이다. 그의 작품 활동을 위해 일선에서 뛰고 있는 탁월한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 결혼 승낙을 받으러 전화 했을 때 그의 아내는 아버지에게 두 가지 질문을 받았다.

“정말 진심으로 이 선생을 사랑하니?”

“네가 선택한 이 길을 마지막 그날까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니?”

“네.”

“그럼 아빠가 축복해 줄게. 엄마에게는 내가 이야기하마.”

자신을 믿어 준 처가 부모들을 위해서라도 그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58살에 또 한 차례 몸을 망가뜨렸다. 멕시코에서 4m짜리 ‘명상자(瞑想者)’라는 조각을 만들다 스케풀드에서 떨어졌다.

그 사고로 비장까지 떼어 냈다. 재활하는데 또 많은 시간과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원형이 결심한 것이 있다. 나의 작은 도움이라도 필요로 하는 곳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2010년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이원형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고국 전시회는 마음가짐이 남달랐다. 그래서 전시회 준비를 열심히 하였다. 한국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거의 모든 작품이 판매되었다.

한국 미술계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라 미술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는 작가의 수익금 전액을 유니세프에 기부하여 전쟁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아프리카 여성을 돕는데 사용하도록 하여 작가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어떤 분이나 분야만 다를 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봅니다. 다만 어디에 쓰일 수 있는 재능 인가를 찾는 것이 우리 모두의 사명이겠지요. 희망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를 밝게, 열심히 살다 보면 한치 한치 그 길이 열리리라 생각합니다. 또, 누구에게나 아픔도 똑같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급하게 욕심내지 않고, 인생을 관조하며 자신을 사랑하며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원형의 나이 칠십이 넘었다. 그동안 치열하게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제는 어머니의 품속 같이 한국이 그립고, 한국인 모두 동등하게 행복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그 한국인 가운데 5% 이상이 장애인이고 장애인 가운데 장애예술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뻐근해진다.

나와 닮은 그들을 위해 더 늙기 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생각은 머지않아 멋진 계획으로 구체화되어 고국을 찾아가게 될 것이라고 그의 아내가 귀띔해 주었다.

# 평론 및 언론 기사

2016 멕시코 신문 “Vallarta Opina”, Gente PV 부문(3월 16일, p.18, 21) 2016 멕시코 잡지 “Bay Vallarta”, 예술 부문(2월 16일, p.5) 2015 캐나다 토론토 한인신문 “The Korea Times Daily”(9월 21일, A6) 2014 존슨 스테이트 칼리지 교내신문 “Basement Medicine”, 예술 & 엔터테인먼트 부문(10월 30일, p.8) 2014 미국 버몬트 “Green Mountains Review”(겨울호 표지 및 p.86-98) 2013 프린스톤 건축 프레스 발행 잡지 “Art Park”(p.186) 2013 캐나다 잡지 “CA Magazine”, Up Front 부문(11월호, p.8) 2013 멕시코 일간지 “Reforma”, 문화 부문(3월 19일, p.14) 2012 이태리 볼로냐 “Italian Art Journal Magazine”(12월호, p.19-21) 2012 캐나다 토론토 한인신문 “The Korea Times Daily”(11월 23일, A2) 2012 미국 세인트 루이스 지역신문 “St. Louis Post”(3월 18일, M1) 2011 캐나다 토론토 한인신문 “The Korea Times Daily”(6월 21일, A6) 2010 캐나다 “The Globe and Mail”, Globe Arts 부문(12월 4일, R18) 2010 한국 “조선일보”, Why? 부문, 예술가와 그의 삶(5월 22일, p.1-3) 2010 한국 잡지 “행복한 집”(6월호, p.52-59) 2010 한국 잡지 “리빙센스”(6월호, p.368-371)

# 대외 활동 및 초청, 수상 내역

2016 아트 노르딕 전시회, 4월 14-17일(덴마크 코펜하겐) 2016 이사벨라 가루쵸 순수 미술: “Black, White & Not!” 전시, 2월 25일(미국 코네티컷 주) 2015~2016 IGI Fine Art & Leclerc Gallery 콜라보레이션, 11월 12일-1월 9일(미국 코네티컷 주, 노워크) 2015 버몬트스튜디오센터, 객원 작가, 10월(미국 버몬트 주) 2015 그랜비 국제조각심포지엄, 8월(캐나다 퀘벡 주) 2015 Art 21Century 선정 예술가 명예의 전당 등극(멕시코 과달라하라) 2014 Sm’Art 국제 아트 페어(프랑스 엑상프로방스) 2014 루브르 박물관, 파리 국제 페어, 10월 24-26(프랑스 파리) 2014 Kasher & Potamkin 갤러리 오프닝 쇼, 9월(미국 뉴욕 주, 첼시) 2014 랄프로렌 쇼케이스(미국 뉴욕 주, 메디슨 에비뉴) 2014 캐나다조각협회 전시회(캐나다 토론토) 2014 The TIA Competition 2013/2014 조각 부문 1등 수상(이탈리아) 2013 국제 예술 전시회 “Passages”(스페인 마드리드) 2013 존슨 스테이트 칼리지, 시각예술 센터 명칭 ‘이원형 조각 스튜디오’로 명명 2013 아베니다 레포르마의 기념비적 조각품 전시회, 초청 아티스트(멕시코 멕시코 시티) 2013 Sabrina Falzone e Arte del XXI Secolo, 2~4월(이탈리아, 밀라노/사보나/토리노) 2012 베르텔리상 수상(이탈리아 볼로냐) 2012 “이집트에서 로마까지”, 11-12월, 주이탈리아 이집트 대사관(이탈리아 로마) 2012 파도바 아트 페어, 11월(이탈리아 파도바)

2010 한국 잡지 “여성중앙”(6월호, p.492-495) 2010 한국 잡지 “mbc 경제매거진”(7월호, p.24) 2010 주간 신문 “감사나눔신문”, 예술 부문(4월 16일, p.6/5월 29일, p.7-8) 2010 성신여대 잡지 “성신피플”, 예술 부문(여름호, p.8-11) 2009 미술 전문 잡지” 월간미술”, 주요 아티스트 특집기사(2월호, p.145-147) 2009 멕시코 잡지 “Bay Vallarta”, No. 130(3월 6일, 20일 p.22-23) 2008 미국 국제조각협회 “Sculpture Magazine”, 주요 아티스트 특집기사(5월호, P.55-57) 2008 멕시코 잡지 “Arquitectura Urbana”(2월호, p.54-55) 2008 멕시코 주간지 “Puerto Vallarta Mirror”, 예술문화 부문, 아트쇼어(11월 20일, p.1-2) 2007 한국 주간지 “시사저널”(4월 17일, p.42-45) 2007 텍사스 주 신문사 “Johnson City Record Courier”(5월 24일, B8) 2007 미국 잡지 “Country Lifestyle”(7월호, 8월호, p.19) 2007 한국 주간지 “Weekly News Journal”(8월 7일, p.78-79) 2007 미국 신문 “The Burlington Free Press”(9월 27일, p.27) 2007 멕시코 신문 “Banderas News”, Art Talk Sec 부문(12월 12일, p.1)

2012 트레비산 예술제, 10월(이탈리아 볼로냐) 2012 버몬트 스튜디오 센터, 6월(미국 버몬트 주) 2012 Voce Di, 4월(미국 뉴욕 주) 2011 세인트 안토니오 멕시코 문화 박물관, 4월(미국 텍사스 주) 2011 “The Red Show”, 2월(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2010 콩고 대통령궁, 콩고 독립 50주년 행사, 작품 ‘가족의 얼굴들’ 선보임, 6월 30일(콩고민주공화국) 2010 “툴트팩 국제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 심포지엄”, 2월(멕시코) 2010 “푸에르토 바야르타 석조 조각 심포지엄”, 1 - 2월(멕시코) 2009 장풍 조각 스튜디오, 객원 작가(중국 베이징) 2009 칭화대학교, 들뢰즈 미학 특강(중국 베이징) 2009 피렌체 비엔날레, 초청 작가(이탈리아) 2009 장풍 조각 스튜디오, 상주 작가(중국 베이징) 2009 루쉰 미술대학, 들뢰즈 미학 특강(중국 심양) 2008 분당 메모리얼 파크, 국제 조각 심포지엄 주관(한국 성남) 2008 존슨 스테이트 칼리지, Master of Achievement Award 수상(미국 버몬트 주) 2008 단국대학교, 들뢰즈 미학 특강(한국 서울) 2008 산업대학교, 들뢰즈 미학 특강(한국 서울) 2008 진화 청동 스튜디오, 객원 작가(중국 대련) 2007 난양 미술대학, 객원 작가(싱가포르) 2007 국제 나무조각 심포지엄 주관(싱가포르) 2007 베니니 재단, 들뢰즈 미학 특강(미국 텍사스 주) 2007 테크놀로지아 데 콘트레이 대학, 들뢰즈 미학 특강(멕시코)

베트남 / 인장 국제 조각공원 미국 / 베니니 재단 조각 전시장, 존슨 스테이트 칼리지 싱가포르 / 포트 캐닝 국립공원 중국 / Aimer 박물관

# 작품 소장 기관

콩고 민주공화국/대통령궁 영국/프라이드 오브 더 벨리 조각공원 캐나다/윈저 조각공원, 워든공원 대한민국/모산 박물관 조각공원, 휘문고등학교, 분당 메모리얼 파크, 코오롱그룹, 운산그룹, 남서울 컨트리클럽, 경갤러리 멕시코/Macay 박물관(유카탄 소재), 피터 그레이박물관(과달라하라 대학), 이센테이널 공원(톨루카 소재)

이원형 작품4 ⓒ이원형

이원형

# 주요 경력 및 활동

캐나다조각가협회, 이사회 임원(캐나다) 국제조각협회(ISC), 특별회원(미국) 즈볼레국제조각협회, 고문(네덜란드 즈볼레) 피터 그레이박물관, 이사회 임원(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버몬트스튜디오센터, 전 이사회 임원(미국 버몬트) OCAD대학 내“ 이원형 순수미술상” 제정(캐나다 토론토) 캐나다조각가협회 내“ 이원형 신진 예술가상” 제정(캐나다 토론토) 캐나다조각가협회 내“ 이원형 조각가 학생상” 제정(캐나다 토론토) 외.

# 학력

존슨 스테이트칼리지, 순수미술학 석사(미국 버몬트 주)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교, 회계학 상급 석사(캐나다) 페퍼다인대학교, 순수미술학 학사(미국 로스앤젤레스)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문학 학사 휘문고등학교 졸업 외.

# 개인전

2017 뮤즈갤러리(캐나다 토론토) 2016 프란시스코 고이타박물관(멕시코 사카테카스) 2016 피터 그레이박물관(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2015 Aimer 박물관(중국 베이징) 2012, 마크 크리스토퍼 갤러리(캐나다 토론토) 2011 오마르 알론조갤러리(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2010 뮤즈갤러리(캐나다 토론토) 2010 경갤러리(한국 서울) 2009 티에리 블루에갤러리(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2008 티에리 블루에갤러리(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2007 뮤즈갤러리(캐나다 토론토) 2007 로프트갤러리(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2006 딥든 아트센터(미국 버몬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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