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스타킹 출연. MC 강호동, 폴 포츠와 기념촬영 모습.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저는 다치기 전 180cm의 훤칠한 키에 건강한 청년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의 포스코에 다니고 있었는데, 건설업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형님의 권유로 다니던 회사를 과감하게 그만두고 건설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저는 건설 현장에서 다양한 업무를 익혔습니다.

그러면서 크레인 조종 면허도 취득하며 미래를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일을 시작한 지 3년쯤 됐을 때 거래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 환한 광채가 제 눈을 번뜩이게 만들었습니다. 제 앞에 아름다운 여인이 한 명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키가 164cm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55사이즈의 날씬한 몸매의 아가씨였죠. 첫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저는 그녀와 3년 연애 끝에 결혼을 약속하고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내 생애 최고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992년 10월 21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저는 현장에서 전봇대 같은 콘크리트 파일을 땅속에 시공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길이 15m, 둘레 3m 무게 2톤 정도의 파일을 크레인 으로 당기고 있었는데 그만 70도 각도에서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파일이 제가 조종하고 있는 크레인의 운전석으로 날아왔습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3초 후면 제게로 올 것 같았습니다. 빛의 속도로 날아오는데도 어쩜 그렇게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던지요. ‘아! 이제 나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하자 온몸에 엄청난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파일은 어김없이 운전석으로 날아왔고 파일을 맞는 순간, 배꼽 아래 부분이 작두로 잘리는 듯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곧바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수술실과 중환자실을 오고 갔지만 여전히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사람이 저의 아내였습니다. 아내는 침상 끝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제발 살려만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제가 깨어나게 됐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깨어나자 사고 당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참을 수 없어서 링거 병을 던지고 손에 잡히는 것을 마구 다 던지면서 내 다리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러대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이렇게 하루를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편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5층 높이의 병원 테라스를 뛰어넘으려고 했는데, 하반신이 마비된 다리로는 도저히 테라스를 넘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제 맘대로 죽지도 못하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배꼽 아래로는 감각도 없고 운동신경도 없습니다.

또한 모든 장기에 마비가 오면서 대소변이 조절이 안 됩니다. 다 큰 남자가 똥오줌을 못 가린다는 수치심 때문에 더 괴로웠습니다. 하루는 병원에서 모처럼 기분 좋게 아내와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그만 휠체어에 앉은 채로 대변을 실수하고 말았지 뭡니까? 제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괜찮아요. 씻으면 되죠.” 하면서 저를 세면장에 데리고 가서 따뜻한 물로 손에 대변을 묻혀 가며 씻겨 주더라고요.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도록 고마웠습니다. 당시 아내 나이가 23살! 행복하게 살아 보겠다고 저한테 왔는데 이렇게 고생만 시키니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 끝에 아내에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평생 책임지지 못할 것 같으니 새 삶을 찾아서 갔으면 좋겠다구요. 그런데 아직도 안 가고 21년째 집에서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점심을 잘못 먹었는지 체한 것 같다며 헛구역질을 하길래 손도 따 주고 등도 쳐 주었는데도 아무런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병원 안에 있는 내과에 다녀오라고 했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내가 임신을 했다는 겁니다.

제가 입원한 지 4주가 되었는데 임신 5주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고 일주일 전에 임신이 된 거죠. 정말 기적이었고 제가 살아가야 할 이유와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너무 기뻐 아내와 저는 두 손을 붙잡고 펑펑 울었습니다. 올해 그 녀석이 21살이 되었습니다.

장애인이 됐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장애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었습니다. 길을 나서면 어린아이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지나가더라구요. “어~~ 저기 장애인 간다.”라고. 장애인이라는 소리가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쏙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인지 알면서 왜 그리 화가 나고 서럽던지. 병원에 있을 때는 환자였지만 병원 밖으로 나오니 장애인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술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술로 이 모든 현실을 잊고 싶었고 나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날도 술을 먹고 집에 들어와 자고 일어났는데 돌도 지나지 않은 저의 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했습니다. “당신 내 아빠 아니냐고?” 아내가 옆에서 자고 있었는데 아내 역시 “당신 내 남편 아니냐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 내가 아빠구나, 내가 남편이구나….’ 가족 때문에 살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재활을 목적으로 접한 휠체어테니스를 열심히 했습니다. 휠체어가 제 다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휠체어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야 뭘 하더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45도 경사로 길을 아침, 저녁으로 100번 이상 오르내리며 휠체어 스피드를 높여 나갔고, 그 결과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속력을 내게 됐습니다. 그렇게 훈련을 하고 테니스 코트장에 들어가니까 얼마나 빠른지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저는 유연성을 위해 수영도 했습니다. 지구력과 근력을 위해 웨이트를 하면서 점점 실력이 향상되었습니다. 테니스 테크닉을 위해 포핸드, 백핸드, 서비스, 발리 연습 등을 전문 코치에게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구요. 드디어 5년 만에 국가대표 선발전 결승에까지 올라갔고 결승전을 무려 2시간 40분 동안 치루는 접전 끝에 15대 13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너무너무 기뻐 테니스 라켓을 하늘 높이 던지고 휠체어에 앉은 채로 운동장에 넘어지면서 좌우로 뒹굴며 기쁨의 세리머니를 했습니다. 국가대표 선수로 전 세계를 다니며 휠체어테니스 선수로 활동하며 세계 랭킹 36위까지 올랐습니다.

이렇게 전 세계를 다니며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었고,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을 보게 되면서 제 삶이 변화되고 성장했습니다. 당시 4살 된 아들을 데리고 전 세계를 다녔습니다. 아이에게 많은 것을 보여 주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죠. 그것이 최고의 교육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빠가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모습을 보며 아이가 참 기뻐하더라구요. 무엇보다 어린이날 놀이공원에서 저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들여보내 주는 것을 보고 우리 아들이 “우리 아빠 최고.”라며 펄쩍펄쩍 뛰었죠. 그때 4살이었는데 장래희망이 장애인이었습니다.

30대 중반이 넘으니 체력과 근력이 떨어졌습니다. ‘아~ 운동은 오래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2의 도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휠체어 4중창 팀에서 노래를 하며 아름다운 소리에 매력을 느껴 성악을 배워 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라켓을 내려놓고 서른일곱 살에 수능을 봐서 음대를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했죠.

2002년 월드컵으로 모든 국민들은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을 때 저는 책상에 엎드려 수능을 준비해야 했고, 성악 실기를 위해 이태리어, 독일어 가사를 죽기 살기로 암기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반신마비로 호흡이 불안정해서 배에 벨트를 묶고 호흡을 연습 했습니다. 세상 일이 뭐 하나 쉬운 게 없더라구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연습 또 연습을 했습니다.

이 어려운 일을 내가 왜 선택을 했나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1년간 죽을힘을 다해 공부를 한 결과 내가 원하는 음대에 합격을 하게 됐습니다. 합격만 하면 고생이 끝날 줄 알았는데 입학 후 더 힘든 길이 나를 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남들보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신체가 남과 다르다 보니 발성 하나 익히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아침 7시에 학교에 가서 밤 10시, 11시까지 고민하며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정말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기에 교수님들과 선후배의 도움을 받으며 당당히 졸업을 하였습니다. 졸업 후 지금까지 2장의 음반을 내며 휠체어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공연을 통해 장애인과 환우들의 힘겨움을 위로하며 장애인 인식 개선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가 장애를 받아들이고 나니까 다른 사람을 돕는 일도 하게 됐습니다. 장애를 입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절망 같았던 장애를 이겨 내려고 애쓰다 보니 국가대표 선수, 성악가, 뮤지컬 배우, 합창단 지휘자 그리고 요즘은 강연 등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됐고. 휠체어스키, 수상스키, 각종 레저를 취미 생활로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가족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작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게 제 남은 생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삶에 있어서 장애라는 고정관념이 저의 삶의 장애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장애, 그것으로 인해 저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편견의 장애를 인정할 때 도전할 수 있습니다. 장애, 거기서부터가 저는 희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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