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반시설과 장애인자립생활보장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9명의 장애인이 ‘국토대장정’을 시작했다. 이들은 23일간 부산을 시작으로 창원, 울산, 대구, 대전, 인천 등을 거쳐 오는 9월 4일 서울에 입성하게 된다. 전국을 돌며 장애인 시설의 문제점과 인권침해·유린 등의 현실과 장애인 자립생활 지원을 위한 ‘장애인자립생활보장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릴 예정이다. 국토대장정을 공동주관한 한국장애인연맹(DPI)의 자료협조를 받아 긴 여정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비를 맞으며 행군하던 도중 국토대장정 대원의 휠체어가 방전되어 확인하는 모습. ⓒ한국DPI

8월 22일, 작성자: 이권희 (서울장애인인권포럼 대표) 대원

이른 아침 미리 챙겨놓은 짐을 차에 옮겨 싣고, 경찰과 만나기로 한 김천역으로 향했다. 김천역 역사에서 따로 잠을 잔 박정선 대원이 걱정이 되어 제일 먼저 찾았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결국은 민원실 비슷한 역할을 하는 별도의 독립된 공간을 얻어 전동휠체어 충전도 하고, 잠도 잤단다. 그 사이 어제 김천 재래시장에서 샀다는 피자두를 대원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역시 ‘왕언니(박정선 대원 별명)’라는 생각이 들었고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이내 경찰은 도착을 했고, 오전 9시 30분에 목적지인 영동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어제보다 속도는 더 붙었고, 다행히 중부지방 폭우가 아직 여기까지 내려오지는 않았는지 여전히 땡볕이다.

땡볕이 힘들기 하지만 비오는 날에 비해 행군속도는 오히려 더 빠르고 전동휠체어 배터리 소모도 덜 한단다. 오늘은 그 유명한 추풍령을 넘어야 한다. 무수히 많은 고갯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전동휠체어도, 핸드싸이클도 모두 긴장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니나 다를까 경사가 아주 가파르진 않지만 쉽지 않고, 그 길이가 최소한 500미터에서 1킬로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고갯길이 연거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시간 만에 약 10킬로미터 정도를 행군해왔다.

대장의 휴식선언과 함께 잠시 행군을 멈추었는데 반대편 차로에서 지나가던 트럭이 잠시 멈추더니 어떤 분이 포도 한 박스를 건네주었다. 성함을 여쭈어 보았으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로 올라타서는 그냥 가버렸다. 다행히 사진은 찍어 놓은 것이 있었는데 한쪽 손목이 절단되신 장애인 분이었다. 이쪽 영동지역이 올갱이와 포도가 유명한 지역인데 아마도 포도농사를 짓는 분 같았다.

그렇게 또 1시간을 행군했다. 짧지만 급한 경사의 고개가 앞을 가로막았다. 핸드싸이클을 운전하는 이권희 대원에 대한 대장을 배려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때도 지나가던 트럭이 신호에 멈춘 사이 기사 아저씨가 내려서 잘 포장된 씨알 굵은 포도를 10송이 정도 주고 가셨다.

이런 것이 시골인심이라는 걸까? 맛있는 포도를 얻어먹게 되어서 좋은 것도 있겠으나, 서울과 같은 도시지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인간적 푸근함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짧은 휴식을 끝내고 대장의 ‘출발’신호에 맞춰서 모두들 막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비가 퍼붇기 시작했다.

서서히 빗줄기가 굵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동이로 쏟아 붇는 것 같은 폭우였다. 전동휠체어는 그나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의를 챙겨 입었으나, 이권희 대원은 아예 작정하고 비를 맞았다. 우의를 입은 상태에서 핸드싸이클 운전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급경사의 고갯길을 오르는데 빗줄기가 얼마나 굵고 세차던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고, 앞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니 대열의 간격도 제각기였고, 줄도 맞지 않아서 옆 차선에서 달리는 화물차가 더 위협적이었다. 이권희 대원은 50미터 정도의 거리를 허윤재 실습생의 도움을 받아서야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갔을까?

내일 목적지인 옥천지역에서 활동하는 옥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사무국장과 팀장이 격려차 방문을 하였고, 오늘의 목적지인 영동까지 길 안내뿐만 아니라 간식꺼리까지 조달하고자 영동지역 자원봉사센터 회장님과 사무국장님도 오셨다. 모두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2시간 정도의 충전을 마치고 오후 행군을 시작했다. 충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문경희, 배재현 대원이 휠체어의 배터리가 급속하게 소모되었다. 급경사의 고갯길 2개를 넘었는데 그 과정에서 배터리 소모가 심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2차 폭우가 다시 쏟아졌다. 더 이상 행군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국도변에 조그마한 화장실이 있었다. 급하게 행군을 멈추고 모두들 화장실로 비를 피해 들어갔고, 부족한 충전도 채웠다. 그런데 이권희 대원은 우의 없이 비를 그대로 맞아서 그런지 추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땅히 조치할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 잘 견뎌주었고,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행군이 시작되었다.

남은 거리는 10킬로미터다. 결국 배재현 대원의 휠체어가 멈추었다. 뒤에 따라오던 리프트 차량이 배재현 대원을 싣고 숙소로 먼저 출발해서 내려주고 다시 행군대열의 후미로 돌아왔다. 얼마가지 않아서 문경희 대원도 멈춰 섰다. 또 다시 리프트 차량이 싣고 떠났다. 그렇게 급경사와 땡볕과 앞을 볼 수 없는 2번의 폭우를 뚫고 최종 목적지인 영동교회에 도착했다.

정말 넓고, 깨끗이 청소된 방, 큰 식당도 딸려 있었고, 남녀가 구분된 화장실, 에어컨, 보일러, 선풍기가 완벽하게 설치된 환상의 숙소였다. 에어컨도, 보일러도 마음껏 사용하라는 교회 측의 배려가 고마웠다.

빗속에 떨었던 몇몇 대원들을 위해 보일러가 가동되었고, 이내 방은 뜨거워졌다.

평가회의는 몇 가지 당부만 한 채 마쳐주었고, 바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원래는 어제 밤에 취침에 들기 전에 행군일지를 써야 하는데, 행군일지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은 23일 오전 5시 30분이다. 다행히 밤새 내리던 비는 멈춘 듯하다.

그러나 언제 또 폭우와 만날지 모른다. 다행히 폭우는 피한다면 기다리는 건 땡볕이다. 우리 대원들의 결의와 각오가 더욱 날을 세워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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