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중앙에 휠체어를 탄 장애여성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다. 그 오른쪽에는 밥상이 차려져있고, 왼쪽에는 인형이 놓여있다. 그리고 무대 앞 한쪽 구석에 자리한 큰 종이 상자.

음악이 흐르며 한 남성이 갑자기 무대위로 올라가 밥상을 뒤엎고는 사라지고, 바닥에는 밥상 위에 있던 그릇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깨져있다. 어지럽혀진 방에 홀로 남겨진 장애여성. 옆에 있던 인형을 꼭 안고 흐느끼더니 다시 인형을 제자리에 내려놓은 후 천으로 덮고는 어지럽혀진 무대를 정리한다.

잠시 후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옷을 입은 채 샤워를 한다.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상처받은 모습에 고통을 이기지 못해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입고 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그러던 그녀가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고 그동안 입고 있었던 검은 옷을 벗고 흰색의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새로운 출발을 암시한다.

반면 앞쪽에 놓여있던 종이상자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점점 그 움직임이 커지면서 상자의 한 부분부터 조금씩 찢어지더니 그 안에 존재한 장애여성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조심조심 상자를 박차고 나온 그녀는 전동스쿠터를 타고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 장애여성의 일상내 폭력을 다룬 퍼포먼스의 한 장면. 왼쪽에 위치한 상자에서 한 장애여성이 세상에서의 `고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침치고 있다. <에이블뉴스>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서울성폭력상담소(소장 장명숙·이하 한국여장연상담소)는 여성폭력추방주간(11월 25일~12월 10일)을 맞아 지난 25일 오후 서울 지하철 동대문운동장역에서 ‘여성장애인 폭력 없는 세상 만들기’ 여성장애인폭력추방 및 학대방지 캠페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내에 마련된 간이무대에서 준비한 퍼포먼스로 시작됐다. 한 무대에서 동시에 펼쳐진 두 개의 퍼포먼스는 두 장애여성이 실제 가정과 사회에서 겪었던 일상과 그 일상 안에서의 폭력을 그대로 전달해 많은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퍼포먼스를 기획한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법제위원회 여성팀 이희정 간사는 “‘상자’는 사회적으로 가해지는 모든 폭력과 세상에서의 ‘고립’을 의미 한다”며 “고립이라는 폭력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지만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그러나 결국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어 상자라는 굴레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합류하고자 하는 여성장애인들의 의지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퍼포먼스가 끝나자 장애여성이 직접 당한 폭력사례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다. 사례발표에 나선 정현주(25·시각장애1급)씨는 부모님이 외출을 할 때 자신을 집에 가둔 채 밖에서 문을 잠가 13시간이나 혼자 지내야 했던 일, 오빠의 결혼식에 창피하다는 이유로 오지 말라고 해서 참석하지 못했던 일 등을 털어놓았다.

▲ 지나가는 시민들이 캠페인에 참여, 낙서판에 `장애여성 폭력추방 및 학대방지`에 관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고 있다. <에이블뉴스>
정씨는 “지금 이 순간에 장애가 없고 걸림돌 없이 생활을 하고 있지만 누구나 중간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장애여성에 대한 폭력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한국여장연상담소는 성명서를 통해 ▲장애여성에게 더 이상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가하지 말 것 ▲폭력추방을 위한 정부와 각계각층의 지속적인 노력 ▲각종 폭력의 실태에 대한 철저한 규명 ▲폭력 근절, 예방위한 법·제도 마련 ▲폭력 피해자를 위한 지원체계 마련 등을 요구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서는 시민의 참여를 위해 장애여성 폭력에 관한 인터뷰 영상물 상영, 시민낙서판, 쉼터기금마련을 위한 모금·서명운동, 폭력추방·학대방지 풍선 터트리기, 배지 나눠주기 등도 동시에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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