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 성북구 보문동 사거리에서 열린 시각장애인 음향신호기 규격서 개선을 위한 현장실험에 참가한 한 시각장애인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자 실험 관계자들이 위치를 바로 잡아주고 있다. <에이블뉴스>

최근 경찰청이 시각장애인용 음향신호기 규격서 개선을 추진하고 있으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어 지탄을 받고 있다.

특히 경찰청이 새롭게 제시한 규격안이 그대로 통과된다면 기존 제품의 기능을 개선하기위한 새로운 예산을 투입해야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예산 낭비의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경찰청과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은 지난 1일 서울 성북구 보문동 사거리에서 새 규격서에 따르는 음향신호기를 설치해 시각장애인 10명을 대상으로 현장실험을 전개했다.

이날 실험에서 선보인 새로운 음향신호기는 사거리에 인접한 음향신호기 두 대가 있을 경우 좌우로 구분하고, 좌측은 남성, 우측은 여성의 목소리로 시각장애인을 횡단보도 신호대기선까지 안내한다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기존 규격서에서 G장조 미뉴엣 멜로디를 10초 이상 발생시켜 시각장애인을 횡단보도 신호대기선까지 유도한 것과 달리 ‘안내음향’을 사람 목소리로 바꾼 것이다.

리모콘 작동거리는 기존에는 직선거리 최소 15m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했지만, 이번 개선안은 횡단보토 폭의 2배로 정했다.

또한 신호등의 등화상태와 횡단보도를 건너야할 시점을 안내하는 신호음향의 경우도 남성과 여성 목소리로 구분시켰으며, 리모콘 작동거리를 기존 횡단보도 폭의 2분1(또는 수신기함체가 설치된 신호기 지주에서 횡단보도 유도블럭이 있는 지점까지의 거리)에서 횡단보도 폭으로 바꿨다.

이날 실험에 참여한 장애인들의 일부는 새로 바뀐 음향신호기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또 다른 장애인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평가가 엇갈렸다.

먼저 남녀목소리로 좌우 횡단보도를 구분한 것에 대해 남녀 목소리의 구별이 명확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평가하는 측이 있는 반면 사람 목소리는 주위 소음에 묻혀 알아듣기 힘들다는 반응이 대조를 이뤘다.

특히 기존 규격서가 G장조 미뉴엣 멜로디를 사용하도록 정한 것은 이 멜로디가 주변 환경의 소음과 명확히 구별되는 음이기 때문인데 사람목소리로 바꾸려는 것은 규격서를 오히려 후퇴시키는 꼴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어 신호대기선에서 리모콘 작동거리를 횡단보도 폭의 2분1로 제한했던 것을 횡단보도 폭까지 확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인접 기기의 오작동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라는 지적이 일었다.

이날 실험이 진행된 서울 성북구 보문동 사거리에는 점자유도블록이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아 실험 조건 자체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에이블뉴스>

실험 자체에 대한 지적도 쏟아졌다. 먼저 이날 실험 주최측은 사거리의 모든 음향신호기를 대상으로 삼지 않고 일부 음향신호기만을 교체해 실험을 진행, 인접 기기 오작동 가능성에 대한 문제를 파악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

또한 실험에 참여한 시각장애인 참가자들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 방향을 잘못 잡아 엉뚱한 곳으로 가면 진행요원이 시각장애인을 통제해 건너기 전과 건넌 후의 중심 이동에 대한 거리를 재는 수치의 객관성을 잃게 했다. 실험 장소 또한 점자유도블록 등이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아 실험 조건 자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실험 참가자들은 지적했다.

실험대상 시각장애인을 10명으로 한정한 것에 대해서도 새 제품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인원이 못 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이날 실험 진행과정을 지켜본 장애인권익지킴이 박종태씨는 “경찰청은 지난 6월 24일 교통안전시설 규제심의위원회를 열어 기존 음향신호기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제품에 대해서 심의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실험을 진행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박씨는 “이대로 규격서가 통과된다면 전국 약 1만8천대의 음향신호기의 기능을 개선하는데 또다시 엄청난 비용의 예산을 투입해야하는 등 혼란이 일 것”이라며 “경찰청의 심사숙고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실험결과는 앞으로 경찰청 교통안전시설 규제심의위원회에 제출되며, 여기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면 규격서 개선은 원안대로 조만간 이뤄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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