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수험생 허광훈(38·뇌병변1급)씨는 지난해 11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포기하고,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함으로써 장애인 수험생의 수험 환경을 대폭 개선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인권위는 명백한 차별인 이번 사건에 대해 소위원회나 전원위원회에서 ‘차별 권고’ 혹은 ‘차별 시정조치’를 한 것이 아니라, 차별행위조정위원회로 넘겨 ‘당사자끼리 합의’를 종용함으로써 조직의 한계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이와 관련 대구DPI는 17일 이번 사건에 대한 입장서를 통해 “이 사건이 ‘당사자끼리 합의’로 조정됨으로써 지난 10년간 국가기관이 자행한 장애인차별은 합법적으로 은폐되고, 장래에 대한 시정의 효과만을 가져오는 제한적 결과를 낳았다”고 인권위를 질타했다.

또 대구DPI는 “인권위의 장애인 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장애인 당사자들의 그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했다”며 “따라서 우리사회의 차별에 가장 심하게 노출돼 있는 장애인들이 그동안 가졌던 인권위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가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특히 대구DPI는 이번 사건이 대학수학능력시험뿐만 아니라 국가고시 등 기존의 수험환경이 장애인들의 특성을 제대로 배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인권위가 제한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에 그쳤다고 꼬집었다.

이어 대구DPI는 하나의 사건이 여러 문제와 연관돼 있는 장애인 차별문제의 특성을 고려해 진정된 사건을 사례별(case-by-case)로 접근하는 소극적 자세를 지양하고, 장애인 문제 전반에 대한 전략적 접근을 지향해야한다고 촉구했다.

근시안적인 대처이외에도 인권위가 인권감수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대구DPI는 지난 1월 13일 내부문제를 제기하며 사퇴한 곽노현 전 인권위원의 예를 들며, “11명의 인권위원들 가운데는 (구성상 한계 때문에) 인권감수성이 부족한 위원들까지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인권위는 지난해 12월 인권의날 기념식을 진행하며 대통령이 발언을 할 때만 수화통역사를 배치하는 물의를 빚어 장애인들로부터 ‘인권위가 장애인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큰 비판을 받고, 사과한 적도 있다.

이에 대구DPI는 장애인 진정사건의 효과적인 처리를 위해 11명의 위원 중 최소 2명 이상은 장애인 당사자로 임명해야한다고 요구했다. 특히 대구DPI는 장애인 문제의 구조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시급히 제정하고, 인권위와 별도로 대통령 산하에 장애인차별금지위원회를 설치해야한다고 촉구했다.

58개 장애인단체로 구성된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에서 지난 14일 발표한 장애인차별금지및권리구제등에관한법률 초안에는 대통령 직속 하에 장애인차별금지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한편 이와는 달리 인권위는 인권위를 소관부처로 하는 사회적차별금지법을 제정할 움직임을 전개하고 있어 향후 장애인계와 마찰이 예고되어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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