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랑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상호 소장. <에이블뉴스>

특별기고/장애인당사자주의를 말한다-⑫

“우리나라 절대빈곤층의 32.7%가 장애인이다. 월 40만원 미만의 소득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장애인 가구가 46%, 특수교육대상 아동 중 초등교육을 받는 경우는 불과 23%, 나머지 77%는 의무교육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방치된 상태에 놓여 있다. 장애진단을 한번도 받지 못한 장애인도 20%에 이른다. 거기에 장애로 인한 사회적 비용까지 합치면 이건 숫제 장애인더러 죽으라는 얘기이다. 실제로 장애인의 70% 이상이 자살을 결심한바 있다.”(강준만의 고백을 중심으로, 1997년)

“시설의 장애인이 돈으로 치부되면 그래도 낫다. 이들은 때로 성폭행의 대상으로, 강제노역의 대상으로, 시설대표의 선행을 드러내는 가치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중략) 시설의 유의미를 인정한다 해도 최소한의 규모로 운영해야 한다. 중증장애인요양원(주류사회의 변하지 않는 입장은 장애인은 환자라는 것이다. 무슨 요양인가? 기약 없는 재활의 전 과정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장애인에게 죽음까지도 환자취급을 받으면서 마감하란 말인가?)이라는 미명아래 200명에서 300명 이상까지 수용하는 대규모 시설을 건립하는 것은 장애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 폐기물로 처리하려는 발상에 다름 아니다. 눈물나는 것은 그 마저 부모가 있는 장애인은 들어가기 어려워 호적을 정리하거나 장애인을 유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장애인은 버려야 보호받는다.”(장애인으로 돈 버는 사회, 참여사회에 기고한 글 중에서 조근태의 분노-나는 그를 생명유지를 걱정할 정도로 빈곤했던 장애언론을 깡다구와 근성으로 버텨냈던 선배이며, 간암으로 몸이 사위어 갈 때에도 당신보다 장애인계를 걱정했던 의인으로 기억한다.)

위에 열거했던 강준만의 고백과 조근태의 분노는 지금 시기에도 유효하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강준만의 고백에서는 장애인당사자가 한국사회에서 주류에 편입되기에는 구조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절대빈곤선상에서 이동과 접근권까지 막혀있다면 장애인이 지역에서 산다고 해도 또 다른 시설이며, 마치 매매춘여성처럼 존재하지만 사회정치적으로 병리화돼 있는 집단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이 가족사의 주요한 결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요원한 것이었으며, 의무교육에서 조차 소외된 이가 기본적인 자치훈련(장애인이 줄반장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한편의 SF 같은 것이다. 장애인을 억압하는 장애사회와 공급체계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비판, 견제함으로써 장애인 스스로의 권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은 눈물나는 것이다.

장애인문제가 생산관계나 임노동에서 출발하지 않음으로써 한국사회에서 장애인문제는 전체적이거나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이것은 입장이 보수이든 진보이든 마찬가지이다.

“부문계열운동은 전체운동에서 볼 때 후비대의 역할을 담당한다. 부문계열운동은 외곽에서 지원하고 보조하는 지위를 가리키는 것이다.”(청년의 진로 중에서)

그나마 80년대의 뜨거운 사회변화의 흐름 안에서도 장애운동은 부문계열운동의 지위에서도 빠져 있었다. 당시 변혁적 장애운동을 지향했던 활동가들이 전체 운동 안에서 장애운동을 담론화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고, 실천했었던 노력의 결과에 비춰보면 실로 참담한 것이었다. 지금도 변혁적 담론 안에서는 장애인문제는 전체적이거나 주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장애인문제는 진보이든 보수이든 항상 우선순위에서 배제된다. 더 나아가서 무지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장애인을 재활시킬 것인지, 장애사회를 폐기시킬 것인지에 대해 변별력을 갖고 있지 않다. 통합화와 주류화는 권력의 이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 관계를 이동한다. 장애인에게 권력을 주면 통합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그 안에 장애인당사자주의가 서 있다. 하지만 지금의 장애인당사자주의는 소박하게 이해되거나 공격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선 생물학적 당사자주의나 유사당사자주의로 대변되는 이익집단적 행위에 대한 비판인데 반문하고 싶다. 여성운동에서 여성이 주체가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여성운동 또한 권력화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편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허나 특정부분만을 과도하게 주목하여 생물학적이니 유사니 하며 왜곡하지 않는다.

노동귀족들의 일련의 일탈행위에서도 노동생물학이니 유사니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생존하기 위해 소요를 일으켰다 하여 생물학으로 대변되는 아메바로 취급받는 집단은 인류역사상 없다. 애초에 장애인은 의식을 가질 수 없는 집단으로 매도하고 집단적 민주주의의 실현 불가능한 집단으로 애써 매도하려는 의도가 뭔가? 현 시기 상징성에 준하는 장애인당사자와 가신그룹에 의해 장애인계가 편향을 보이고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특정단체의 모든 회원을 매도 할 정도의 부피인지 반문하고 싶다. 의식적 편향에 근거한 과도한 주목과 장애인의 역사의 무지의 결과이다. 불과 수 십 년 전만 해도 장애인단체의 대표조차 보건복지부에 출입을 통제 당했다. 사회구조적 모순을 통찰하고 목적의식적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자생적 당사자성을 기반으로 집단성을 실현했던 장애인단체의 헌신성은 평가받아야 한다. 그것이 천박한 것이라면 오히려 장애인의 역사를 통찰하지 못했던, 장애대중운동의 성장판에 대해 무지했던 활동가들의 오류이다. 한국사회의 진보에서조차 섬처럼 관심밖에 밀려있었던 장애인집단은 생존하기 위해 급급했었고 공급자들은 장애인의 빵을 늘리기보다 공급자의 빵을 늘려왔다. 이는 한국사회의 주요한 관심 밖에 있었던 장애인문제의 올바른 해결에 대한 변별력을 갖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장애인복지라는 미명아래 통합을 가로막는 장치들을 확대해왔다. 기약도 없는 재활과 수용시설의 늪에서 장애사회를 신음하며 장애인당사자는 살아 왔고 살고 있다.

생물학적 당사자나 유사당사자를 얘기하는 주장은 원시적 소요나 일탈행위에 대한 과도한 주목을 넘어 의식적 기권과 비참여적 기권을 조장하고 선별적 선도투중심이었던 장애운동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

공급자 대비 마땅한 재생산구조와 권력을 양분하고 있지 못하는 장애인당사자집단의 특수성을 볼 때 이러한 과도한 주목과 비참여적 기권은 장애인당사자집단의 건강성과 대중운동으로서의 성장판을 막고 있는 것이다. 더욱 문제시 되는 것은 현재의 전달체계는 장애인당사자가 전 삶에 걸친 장애인문제를 학습할 기회를,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문제의 본질을 깨달을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애인당사자 역시 장애인문제를 왜곡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내재하고 있다. 예산과 권한을 가지고 있는 공급자와 생존하기에도 급급한 장애인당사자는 불평등한 권력의 구조를 원천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흔히 와상장애인이니 재가장애인이니 자기결정과 선택이 불가능한(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객관적 과정에 따른 선택과 집중이 유효할 뿐이다) 지적장애를 예로 들어 장애인당사자주의를 비판하고는 한다. 아니 현실 불가능함을 얘기한다.

집에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강요당하는 것은 애써 무시한 채 어떻게 집에 편하게 있게 할 것인가를 장애인복지라고 한다. 와상장애인은 또 무슨 말인가? 침대에 누워 있는 장애인을 말하나 본데 목욕차량 가져가서 목욕봉사라는 것은 동네 골목골목마다 장애인의 신체를 노출시키고, 이성목욕보조까지 서슴없이 행하다 보니 이런 말이 나왔나 보다.

기간 장애는 장애 스스로 역량을 강화하여 환경에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노력보다는 누군가의 진단과 처방에 의한 의존을 통해 해결해 왔다. 이는 장애라는 객관적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부정당해왔던 장애인당사자에게 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거나 자원을 조직하고 활용하는 능력에 대한 실천의 부재로 더욱 의존적인 삶을 노정해 온 것이다.

중증일수록 배제의 역사는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져 왔으며,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보다는 적당히 분리시키고, 은폐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장애인의 객관적 삶을 조명해보면 자기결정과 권한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는 장애 개인의 문제였다기보다는 기간 접근방식의 문제였음을 유추할 수 있겠다. 장애는 사회적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규정된다. 지적장애영역만 해도 서구에서는 전체의 80%가 자기결정과 선택이 가능함을 얘기하고 있으며,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사회의 현실이 이에 따라가지 못하는 객관이 있겠지만 그것을 한계로 인정할 것인지, 권리에 기반해 사회변화를 도모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제 명확히 선을 긋자! 반대한다면 당신은 장애인당사자주의자가 아니다. 아니 권리에 기반한 장애인문제 해결에 반대하는 것이다.

지적장애라고 해도 그의 결정을 존중하여야 할 것이며, 그가 살아왔던 객관의 삶을 이해하고 그의 속도와 역량에 맞게 과정을 함께 하여야 한다. 그것이 장기간에 걸쳐 이뤄진다 해도 그를 차별했거나 배제했던 우리의 반성에 비하면 그의 요구와 시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불가능한 것인가? 불가능한 존재전이를 꿈꾸지 말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권한을 장애인당사자주의자에게 이양하라! 아무리 주의, 주장을 해도 한국사회는 장애인문제에 대한 무지의 늪에서 빠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인류가 멸망할 때 까지 자원봉사는 유지될 것이며 사랑, 동정, 시혜라는 악성코드는 장애인당사자주의자들의 곁에 유령처럼 떠 돌 것이다. 장애대중운동의 성장판을 강화하자!

인류사회의 모든 주체논쟁의 귀결점은 항상 주체와 과정상의 의식주체, 집단의 권력화를 통해 이뤄져 왔다. 소모적인 물리적 장애상태를 기준으로 한 주체논쟁을 마감하고 주체동력과 보조동력의 명확한 지위와 역할분담과 장애인문제에 대한 의식적 목표치에 대한 공유를 통해 장애와 비장애를 아우를 수 있는 진정한 장애인당사자주의자-다시 한번 말하지만 장애, 비장애의 천박한 이분법적 논리는 마감되어야 한다-의 태동과 확산을 이루기를 염원한다.

장애아 부모님은 비장애아 부모님과 또 같은 시간과 역량만 자식에게 투자해야 한다. 인간승리풍의 결과의 평등은 마감돼야 할 것이며, 누구나 똑같은 출발선상에서 자유롭게 선택 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장애인당사자주의자들은 보장받아야 한다.

탈시설화, 통합화, 주류화에 대한 장애인당사자주의자들의 간곡한 전망의 기대치는 장애인당사자주의의 낙관과 권리를 중심으로 한 실천의 촉구이며, 이 중심에 물리적 장애상태를 넘어서는 장애인당사자주의자들이 있다.

*본지가 창간 3주년을 맞아 실시하고 있는 특별기고 ‘장애인당사자주의를 말한다’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글은 사람사랑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상호 소장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앞으로 더 기고를 원하시는 분은 에이블뉴스 편집국(전화 02-792-7785, 팩스 02-792-7786)으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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