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4일. 저녁을 먹고 난 뒤 한가롭게 활동보조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아침에 약간 있었던 감기기운도 없어져서 어느 때보다 정신이 상쾌했고 기분도 좋았다.

내가 그렇게 저녁을 한가롭게 보내는 것이 2분짜리 뉴스에 한없는 부끄럼이 되었다. 그날 전주지방법원에서 있었던 재판에서 원생들이 수년 동안 성폭행을 당한 것과 관련 관리 책임 소홀 등을 이유로 해임된 자림복지재단 이사들과 감사들의 해임이 부당하다고 선고 받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큰 관심사 중 하나였던 자림원 성폭력 사건을 까맣게 잊어버린 못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광주에서 인화학교 장애학생들이 교사들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던 것처럼, 우리 전주자림원에서도 원생들이 전 전주자림원 원장 조모씨와 전 보호작업장 원장인 김모 씨에 의해서 수년 동안 원생들이 성폭행이 있었다.

김 씨는 전주자림원내에 있는 보호작업장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여성 지적장애인들을 외딴 곳이나 사택으로 데려가서 성추행을 했다. 조 씨는 전주자림원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기숙사와 강당에서 여자원생들을 성추행했다.

그들의 파렴치한 범죄는 지난 2012년 내부자 고발로 사법당국의 진상조사를 받으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전주시내 장애인단체들과 시민단체들은 이 사건을 인화학교 성폭력사건을 세상에 널리 알린 공지영의 소설 제목을 따서, ‘전주판 도가니’ 사건이라고 부르면서 사법당국에 가해자들의 엄벌과 자림복지재단의 법인설립허가를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전주지방법원도 이 요구를 받아들여 작년 2월 조씨와 김씨에게 징역 각각 13년과 10년을 언도했고, 이것이 대법원에서도 인정되었다. 또 작년 연말에는 전주지방법원에서 자림복지재단의 법인설립허가도 취소되었다.

한 장애인 관련 단체에서 전주지림원 성폭력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활동했던 나는 오랫동안 성폭력에 시달려 왔던, 원생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데 작은 힘을 더한 것 같아 가슴이 뜨거워졌다.

전주자림원 성폭력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전주 시민들이 얼마나 될까? 알고 있다고 해도 일시적인 분노를 주고, 분노가 잊어질 때쯤에 다시 잠시 통쾌함만 주고 금방 잊어버리는 뉴스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수년 동안 원생들이 자림원 원장과 보호작업장 원장에게서 성폭행을 당한 일도, 그들이 사법당국에서 엄벌을 받은 일도, 전주자림복지재단의 법인설립 허가가 취소되는 일도, 전주시민들의 생활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뉴스시간마다 쏟아져 나오는 많은 뉴스 중 하나밖에 되지 않는다. 정작 장애인인 나도 한 장애인 관련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기 전까지는 전주자림원 원생들이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는지도 몰랐었다. 어쩌면 다른 시민들처럼 한낱 뉴스로 보고는 금방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장애인으로 태어났지만 좋은 가족들을 만나서 시설에서 살아 본 적이 없고, 내 주위에는 나를 옹호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많아서 억울한 일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시설에서 성폭행을 당했던 원생들의 억울함이나 슬픔을 전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들 중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끼린 서로 불쌍하게 여기고 더 많이 생각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운이 좋아서 좋은 생활환경에서 고마운 사람들의 옹호를 받으며 살았던 나는 이 말의 뜻을 가슴에 품지 못하고 성장했다.

매주 있는 자조모임에서 전주자림원 성폭력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자주 듣고. 이 사건 때문에 활동하면서도 성폭력 원생들의 억울함과 고통에 동감할 수 없었다.

그저 순간순간 성폭력을 당할 때 공포에 질린 피해자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금방 없어지는 성냄만 가지고 했을 뿐 나와 같은 장애인들의 억울함과 고통이 남의 일로만 생각했다.

만약 같은 장애인으로서 그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내 일처럼 생각했다면 아무리 감기기운이 있어도 그날 아침에 전주지방법원에 가서 피켓시위를 하고 재판도 관람 했을 것이다. 아니 작년 말에 전주지방법원에서 선고된 자림복지재단의 법인설립허가를 취소한다는 판결이 대법원에서도 인정받을 때까지 주의 깊게 지켜봤을 것이다.

성폭력을 당했던 전주자림원 원생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한 번도 내 일처럼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작년 연말에 전주지방법원에서, 자림복지재단의 법인설립허가 취소 선고가 내려진 이후 전주자림원 성폭력 사건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런 죄책감이 있어서 그날의 판결 결과가 같은 장애인들의 어려움을 살피지 않은 나의 잘못인 것 같아 한없이 부끄러웠다.

이 판결로 지위를 보장 받은 전주자림원 이사들과 감사들이 자림복지재단의 법인설립허가취소를 막으려고 하면 걱정이 앞선다.

원생들의 성폭력사건을 조씨와 김씨의 개인적인 돌발행동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면 2심, 3심에서 1심 판결이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도 있다. 그것을 예고하듯이 지금 자림복지재단 쪽에서는 장애인복지에서 노인복지로 사업영역을 변경하려 하고 있다.

자림복지재단 이사와 감사 해임 관련 재판 전 전북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의에서 나는 적반하장적인 재판이란 것을 알았다. 자림복지재단 쪽에서 성폭력 사건을 자기들과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 재판이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이 이사들과 감사들이 퇴근한 뒤에 일어나서 조씨와 최씨의 범죄를 알지 못 했다는 이사들과 감사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이 있듯이 수년 동안 계속되었던 성폭력 사건을 전혀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이것 말고도 자림복지재단 이사들과 감사들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성폭력 사건 진상조사와 함께 실시한 특별감사에서 소방시설 기능보강사업 공사비 과다지출, 직원들에게 절적하지 않은 포상금, 생활지도 보조금 지출 및 사후관리 소홀 등 11가지 자림복지재단의 문제들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 장애인 과련 단체들과 시민단체들은 보다 깊은 2차 특별감사를 실시하고 형사고발하여, 비리의 주모자도 밝혀내어 처벌한다고 주장했지만 전라북도와 전주시는 행정처분 3개월만 내렸다. 수사권이 없는 행정처분을 내린 것을 보면 자림복지재단의 문제에 대한 전라북도와 전주시의 태도를 짐작 할 수 있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 미래의 상황도 알 수 있다. 성폭력 사건만 가해들이 있는 범죄로 만들고 나머지 문제들을 유령이 일으킨 것으로 만들려는 전라북도와 전주시의 모습을 보면, 노인복지사업으로 변경하여 또다시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는 자림복지재단의 미래 모습이 우려된다.

나는 한 달 전 치러진 4·13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치판을 바꾸어 놓는 국민들의 놀라운 힘을 봤다. 한 국가의 정치판을 바꾸어 놓는 데는 온 국민의 필요지만 하나의 재판을 바꾸는 데는 한 지역에 시민들의 힘만으로도 가능하다.

온 전주 시민들이 감시자가 된다면 지난번 재판같이 각종 문제를 일으킨 자림복지재단의 이사들과 감사들이 무죄 받은 일은 없을 것이다. 가지만 병든 나무는 가지만 자르면 되지만 뿌리가 썩은 나무는 뽑아버려야 한다. 자림복지재단의 법인설립허가를 취소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나는 그때까지 가장 먼저 감시자가 될 것이다. 이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과 동감하는 마음 없이 전주자림원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던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전주에 사는 장애인 활동가 강민호 님이 보내온 글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도록 기고 회원 등록을 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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