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쯤이야..." 휴일을 맞아 봄나들이 하러 한강공원에 모여든 서울시민들. ⓒ정중규

여의도 벚꽃길이 오는 4월 2일부터 폐쇄된다 해서 아쉬움에 전동휠체어를 타고서 국회 주변 윤중로 벚꽃길 나들이 나섰다가 아예 샛강길 따라 물빛광장 거쳐 여의도를 한 바퀴 돌아 한강공원까지 가게 되었다.

한강공원은 코로나19 사태가 무색하게 시민들로 인산인해였다. 바이러스도 겁내지 않는 시민들의 자유분방함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모이길 좋아하는 국민도 드물 것이다. 광장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방 후 역사를 돌이켜봐도, 우리의 역사는 모두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진 굴직굴직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4.19혁명, 반독재투쟁, 민주화운동, 5.18광주항쟁, 6월민주항쟁, 촛불혁명까지 우리는 광장에서 역사를 만들었다. 혁명이란 것이 절대권력을 향한 집단행동의 산물임을 염두에 둘 때, 왜 우리의 현대사에 혁명과 같은 일들이 잦는지도 이해가 된다.

집단주의에 병폐도 당연히 따를 것이다. 해방공간에서의 극렬한 좌우 대립은 남북분단의 단초가 되었다. 그것이 차후 패거리 진영정치의 뿌리가 된다. 최근에까지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나눠 세를 과시하는 광장정치로 이어져, 나처럼 서초동도 광화문도 아닌 사람들은 정치적 미아처럼 소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진보정당에서 활동할 때도 나는 "진보정치마저 어떻게 패거리 정치인가. 당론이 정해져도 자신이 판단해 옳지 않으면 거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진보정치 아닌가"하는 내부 비판 서슴지 않았다.

모난 돌이 정 맞았던 역사적 트라우마 때문인가. 홀로 있으면 왠지 불안하고, 집단 속에 들어가야 안심이 되는, 혼자서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이런 심리적 기제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누구는 수천 년 동안 마을 단위로 같은 씨족이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공동체 생활한데서 비롯되었다 하고, 누구는 잦은 외세 침략에 맞서 싸우려 결집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하고, 누구는 사색당파의 잔재라 비판한다. 하기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해방 후 단골 선거구호였다

푸코가 인간을 집단화시킨 근대의 제도적 장치로 꼽은 감옥, 수용시설, 병원, 학교, 공장, 군대. ⓒ정중규

집중화-대형화의 상징 바벨탑 쌓기에 대한 하느님의 비책은 흩어버리기

그렇게 뭉치고 또 뭉치다보니 대한민국은 어느덧 집중화-대형화의 길 위에 서게 되었다. 장애인복지 주거시설에서의 꽃동네 같은 대형수용시설 탄생, 슈퍼마켓 잠식하며 골목상권 독식하는 대형마트들, 벤처는 물론 중소기업조차 생존 힘들게 하는 대기업, 특히 삼성동물원-LG동물원이라 표현할 만큼 재벌친화적인 기업환경, 교회마저 대형교회를 선호해 세계 10대 메가처치에 다섯 개나 이름 올린 대한민국, 20년 지방자치 시대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중앙집중화의 견고한 서울공화국 등 약육강식을 당연시하는 빈익빈부익부 피라미드 사회가 되었다.

그런 사회가 바이러스에 취약할 것은 당연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정신장애인들의 집단 사망을 부른 청도대남병원을 시작으로 집단 확진자가 대거 발생하는 장애인거주시설과 요양병원, 신천지교회를 비롯한 종교 집회들, 콜센터와 학원, 군부대 등 사람이 뭉쳐있는 곳만 쫓아다니며 확진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감염 위험 때문에 모임을 가질 수 없어 황망한 처지로 후보자들을 몰아넣고 있는 헌정사상 초유의 기이한 총선 분위기까지 그려지고 있다.

현대사회의 병리현상 그 원인을 근대사회의 발명품 학교, 병원, 수용시설, 공장, 군대, 감옥 같이 집단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에서 찾았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그 모든 곳이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한 곳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광기의 역사>에서 정신병원 탄생사를 짚은 그는 <감시와 처벌>에서 신체형이 지배하는 형벌사회에서 감옥형이 지배하는 규율사회로 변화하는데 감옥, 학교, 공장, 군대 같은 근대사회의 대표적 제도적 장치들이 인간을 어떻게 집단주의 희생자로 만들어갔는지를 그리고 있다. 학교는 성적으로, 군대는 병력으로, 감옥은 처벌로, 병원은 질병에 대한 지식의 권력으로 인간을 통제하고 집단 속으로 몰아넣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바벨탑을 세우는 그들은 다짐한다. 그처럼 바벨탑은 집중화-대형화의 상징, 이에 대한 하느님의 비책은 당연히 흩어버리는 것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바로 뭉쳐져 있던 우리를 흩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고 가르치는 듯하다.

장애인 탈시설운동 역시 이런 복지시설의 집단화-대형화 추세에서 벗어나 사회통합의 지름길인 개별화를 꾀해야 한다는 보편적 인권 차원의 갈망에서 비롯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은 장애인 배제 시대였던 200년에 걸친 산업혁명시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반성이기도 하며, 장애인탈시설운동의 당위성을 재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2018년 12월 12일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발달장애인 정책의 현실과 미래, 탈시설을 둘러싼 이슈 논쟁" 주제로 열린 한국가톨릭장애인사목협의회 세미나 모습. 왼쪽부터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민용순 수석부회장, 가톨릭장애인부모회 한순희 씨, 장애인복지시설협회 황소진 정책분과위원장, 나사렛대학 김종인 재활복지대학원장. ⓒ정중규

너무 가까이도 아닌 너무 멀리도 아닌 알맞은 거리에서 바라보기

코로나19 기세가 대단하다. 여의도벚꽃축제 취소는 물론 벚꽃 길을 아예 전면 폐쇄해 통행 자체를 금지시킨다고 한다. 정치 때문에 여의도주민이 되면서 즐기는 연중 축제가 봄의 여의도벚꽃축제와 가을의 여의도불꽃축제였는데 아쉽다.

사회적 거리두기든 물리적 거리두기든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우리는 홀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수필집 <아름다운 마무리>에서의 "사람이든 사물이든 또는 풍경이든 바라보는 기쁨이 따라야 한다. 너무 가까이도 아닌 너무 멀리도 아닌 알맞은 거리에서 바라보는 은은한 기쁨이 따라야 한다."는 법정 스님의 말도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주변에서 코로나19 사태로 뜻하지 않게 자가격리나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집단에서 벗어나 홀로 되면서 오히려 바쁜 일상 속에서 놓쳤던 자신을 돌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비록 자발적인 휴식은 아니지만, 이제껏 앞만 보고 치열하게 달려만 오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지니 각별하다는 말이다. 사람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서 있어야 할 알맞은 거리란 얼마인가를 생각해 보는 오늘이다.

*이글은 정중규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맹 수석부회장 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785)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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