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식 전 유엔장애인권리위원.ⓒ에이블뉴스DB

온 나라, 온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만연으로 온통 어수선하다.

이런 때에는 어떤 주제로 기고문을 써야하고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대중매체와 유튜브를 가득 채우는 세계적인 의학계 전문가들의 견해를 마구 인용할 필요도 없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1943년 대서양 선상에서 독일의 어뢰정을 피해가면서 윈스턴 처칠과 루즈벨트가 진진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당장의 전황이나 군사적 전략보다는, “종전 후 파괴된 세계를 어떻게 재건하고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가”하고...우리도 마찬가지로‘코로나 태풍 이후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하는가?“하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다소 생뚱맞기는 해도 감히 ‘보다 더 공정한 사회, 인간다운 사회‘를 생각해 보자는 제안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에이블뉴스’의 주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 주제는 사실 사회복지/사회정책 전공자로 오래 고민하던 중 얻게 된 하나의 학문적, 실천적 비전이다. 공정사회, 인간적인 사회가 온다면, ’에이블뉴스‘의 기고문을 통해 늘 다루오던 편견, 차별, 증오, 배제, 소외 등의 문제도 다소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가 없지 않아서이다.

사실 '공정한 사회, 인간다운 사회'는 그렇게 새로운 주제는 아니지만 자본주의, 신 자유 이념에 비해 힘 있는 주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1970년대 개발도상국의 경제학자들이 주도했던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새로운 경제-New Economic Order, ‘인간의 얼굴을 한 개발과 성장,’ ‘사회 친화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 심지어는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공정사회’가 온다면 장애인을 포함한 취약계층, 탈 북민, 이주노동자와 같은 소수자들의 역량을 강화시켜주고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여 기여할 수 있게도 할 것이다.

물론 한국정부의 ‘공정거래위원회’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제 선거철도 닦아오는데, ‘인간다운 사회, 공정한 사회’를 정치 구호로 삼는 정치가들도 나왔으면 한다. 정의, 책임, 연대의식이 강한사회로 가기위해서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선거유세 당시 유명한 캔사스 유세 연설에서 무려 14차례나 공정사회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공정에 기반 하여 선거 후에 부유층의 세금을 1% 인상키 위해, 그리고 임금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인상을 위해 투쟁했다.

한국사회에서는 ‘양극화’같은 경제, 사회 불평등의 주제가 우세한 반면 미국, 영국, 호주와 같은 나라에서는 ‘공정사회’가 사회의 큰 쟁점이며 관련 기사와 문헌도 많이 출판되고 인터넷도 뜨겁다.

2017년 3월 20일에는 ‘세계 사회정의의 날’이었다. 이 행사는 공정한 자원과 기회의 공정한 접근과 인권과 자유에 기반 한 세상이었다. 특히 빈곤퇴치, 품위 있는 직장, 평등한 법적 접근을 강조하며, 사회정의의 핵심은 국적, 인종, 젠더, 성적취향 및 경제-사회적 특성을 초월해야 함을 핵심과제로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에 의한 최저임금 보장, 노동시간 단축 등은 한국 사회에서 역풍을 맞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이러한 정책은 공정과 소득과 기회의 재분배에 관한 것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질서 확립에 있는 것이지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분배, 사회적 혜택의 기반을 넓히려면 사회적 합의와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국민적 지지를 얻어내기가 싶지 않다. 그만큼 공정사회, 인간다운 사회의 길은 멀고 험난하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의 샌더스 상원 의원은 분명히 ‘공정사회’쪽인 것 같은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도 아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특성인 타자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가지며 의미 있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특성은 우리로 하여금 타자의 욕구와 이익을 고려하여 균형을 이루게 한다.

공정은 공정의 대상이 되는 타자에 대한 상응하는 장점/우수성 (반대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행위도 있다)을 고려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공정에 대한 처운 최종적으로 문제가 될법한 상황을 무시할 수 없으며, 문제나 갈등이 발생할 경우는 절충이나 타협이 불가피해 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의 계절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지’를 분명히 짚어 볼 여지를 갖게 해야 한다. 그래서 ‘공정사회’의 추구를 화두로 꺼내 본 것이다. 모든 것이 정부의 책임만은 아닐 것이며 고용주에 해당하는 기업과 시장경제의 역할이 원만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자본론을 설파한 토마스 피케티 (Thomas Piketty)는 온 세계가 세습적인 부의 불평등 시대로 후퇴하고 있다는 개탄을 한다. 기업과 시장경제의 역할이 원만하게 균형이 어렵다는 이야기 같다.

‘공정사회, 인간다운 세계’로 가기 위한 처방은 분분하겠지만, 이 기고문에서는 세 영역에 집중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건강의 평등화, 사회적 혜택, 최저임금의 보장이다.

바람직한 사회는 국민의 안녕을 보장해야 되고, 그 첩경은 건강권/의료 접근의 불평등 요소를 최소화하며 건강의 공정성을 보장해야 한다. 미국의 정치가들도 부러워한 한국의 국민보험은 자랑할 만하다. 온 나라가 이룩한 경제성장과, 이에 따른 의료 시장의 활성화, 국민들의 전반적인 교육 수준 향상, 국가와 관련 기관에 의하여 수행되어온 의료연구의 공이 큼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불평등의 요가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시장경제에 모든 것을 맡겼더라면 이러한 성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는 것만을 강조해 둔다. 유럽에서 수행된 여러 연구의 결과에 의하면, 전반적인 사회보호, 개선된 의료 서비스, 보다 관대한 실업급여, 건강을 보호하는 안전한 고용환경 개선을 위한 당양한 사회정책이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낸다고 한다.

다음은 최저 임금의 보장이다. 고용조건도 열악하고, 실직의 경험이 많는 장애인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이 문제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알 수 있다.

흔히들 대 기업과 중 소 기업의 극심한 임금 격차를 문제로 제기하듯이! EU 의 한 연구는 다차원적 분석에 기초하여 ‘정당한 사회의 분석’에 관한 자료를 내 놓았는데, 요약하면 중·장기적인 소득의 불평등, 디치탈 화 인공지능 (AI)기반의 사회가 여하히 시장경제에 의한 불평등을 악화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직접세와 사회혜택제도의 소득 재분배 영향 이다.

이 보고서는 결론으로 ‘공정성’ 은 결국 주관적이라며, 행동과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연구 대상자들의 ‘공정’과 ‘불평등’에 대한 태도’와 관점을 중요시 했다. 아울러 국내 자료에만 제한하지 말고 다른 나라와의 비교학적 관점도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너무 길어지는데, 아래의 몇 가지 질문으로 마감해 보자.

미국에서는 ‘정당사회’에 관한 한 코닝 (Peter Corning,2011)을 꼽아주는데, 그의 입장은 ‘정당한 사회’란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의 경제-사회제도의 양립에 관한 철저한 연구‘라고 정의 한바 있다.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과연 정의라는 것이 사회적 의무인가 아니면, 개인의 이기심이 더 강한 것인가? 이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정의로운가, 아니면 이기주의적인가? 더 나아가 저본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것이 더 공정한가?

쉽게 해답을 요구하지도, 시도하지도 말자. ’공정사회‘의 핵심 특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플라톤, 루쏘, 홉스, 흄, 칸트. 칼 마르크스 등 세계의 철학자들이 고민하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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