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가전제품, 새 스마트폰, 새 자동차, 새 집'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도 좋지만 새 것이 주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미지의 경험이 주는 설렘 역시 그 못지 않다. 그러나 나는 최근의 경험들 탓에 '새 것'하면 떠오르는 것이 씁쓸하게도 '설렘'이 아닌 '터치패드'가 되어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벽을 더듬었다가 비프 음과 함께 불이 꺼지거나 비상벨이 울리거나 보일러가 켜지는 상황들이 난감함을 넘어 이젠 그러려니 하는 일상이 되어버린 탓이다.

지난 2월, 우리 가족은 부푼 기대를 안고 신축 아파트에 입주했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던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안내견의 배변을 위해 잠시 밖에 나갔다 들어와보니 집안 가득 울려 퍼지고 있는 비상벨 소리에 깜짝 놀랐다. 내가 잠시 집을 비웠던 5분 남짓 동안 집 안에 뭔가 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배달음식이 도착했고, 문을 열어주려던 와이프가 월패드를 더듬다 비상 버튼을 눌러 벌어진 일이었다.

사실 전부터 이런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 열림 버튼 위에 스티커를 붙여 표시를 해두었지만 비상 버튼과 문 열림 버튼이 서로 근접해 있던 탓에 살짝 스친 손 한 번에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비상벨이 울리고 얼마 후, 방제실에서 보안팀 직원이 방문했고, 우리는 실수를 사과하며 현재 상황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난감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재발 방지를 위해 무언가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미관상 하고 싶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될 짓이었지만 서랍속 어딘가에 굴러다니던 오델로 한 알을 전기테이프로 붙여 비상 버튼을 가려버렸다. 월패드에 붙어있는 오델로 알을 만질 때마다 올라오는 안타까움과 짜증이란...

얼마 전에는 와이프가 문 열림 버튼을 누르려다 보일러를 가동시켜 한 여름에 온 집안을 찜질방으로 만들었다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또 며칠 전 깜빡하고 카드키를 들고 나가지 않았던 나는 집에 들어와 카드키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자서는 열 수 없는 공동현관 문 앞에 망연자실 서서 내 집조차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현실에 커다란 무력감과 분노를 참아 눌러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실수들은 중증의 시각장애가 있는 나와 아내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우리 가정의 활동지원사 선생님은 싱크대에서 그릇을 꺼내려다 상부장 아래 부착되어 있는 주방 TV폰을 잘못 건드려 경비실 통화 버튼이 눌러지는 바람에 근무 중인 경비아저씨와 몇 번이고 어색한 인사를 나누셔야 했다.

또 나의 어머니는 우리 집을 방문할 때 마다 공동현관 터치패드의 숫자가 너무 작아 누르기가 어렵다며 투덜거리시곤 한다.

마냥 웃고 넘기기엔 뒷맛이 참으로 씁쓸한 경험들이다. 무인단말기나 도어록의 사용을 어려워하는 장애인과 노년층의 사례를 보노라면,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들이 지나치게 '장애가 없는 젊은층'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접근성이 결여된 제품과 서비스 환경으로 인해 동일한 대가를 지불하고도 정당한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는 정보소외계층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비장애인에게는 당연히 편리하리라 여겨왔던 터치 기반의 환경 역시 사실은 그들에게도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던 월패드나 키오스크와 같은 터치 기반의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있는 것일까? 결론만 말하자면 그렇다.

요즘 IOT 업계의 대표적인 키워드를 꼽자면 커넥티비티와 사물인터넷을 들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 사물과 사물이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고 이들을 공간 제약 없이 어디서나 제어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는 얘기다.

최근 출시되는 제품들을 중심으로 원격 제어를 위한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제품의 동작상태 및 제어를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도록 개발되고 있는데, 우리 아파트역시 월패드와 연동되는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일부 기능을 스마트폰에서 제어할 수 있어 조금이나마 생활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플리케이션도 시각장애인에게 완벽한 대체수단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모든 기능은 터치 조작부를 통해 사용하고 스마트폰용 어플리케이션은 일부 기능만을 지원하도록 하고 있는 제품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가전제품 IOT기능의 경우 상위 모델 혹은 고가 모델에만 탑재되는 경우가 많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고가 모델을 구매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문제다.

수많은 터치 환경과 무인정보단말기에 시각장애인이 분개하는 이유는 기기의 설계부터 시각장애인의 사용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평평하고 차가운 유리판의 촉감을 통해 적나라하게 체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고객'이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나 자신이 철저히 배제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느껴지는 그 난처하고 자존감까지 흔들리는 기분은 정말로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러나 10년 전 아이폰이 처음 등장했을 때 터치 기반 스마트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각장애인이 그토록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보이스오버'라는 기능을 통해 시각장애인도 동일한 사용자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애플의 철학 때문이었다.

선택권이라는 것은 그저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고, 영원한 정보 소외계층이라 체념하며 살다가 최신의 스마트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느끼게 된 자유로움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희열과 더불어 자존감이 상승하는 색다른 경험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최근 점차 나아지고 있는 추세이기는 하나, 간혹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접근성을 지켜 달라고 요구를 할 때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무리하고 번거롭고 불필요한' 요구로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장애인이 편한 환경은 결국 비장애인에게도 편리한 환경이 된다는 좀 더 큰 미래를 그려보는 건 어떨까?

보편적 설계를 이야기 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경사로의 경우 계단을 경사로로 바꾸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의 노고가 필요하지만 이러한 노력을 통해 비장애인과 장애인 모두가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경사로가 만들어진 것처럼 제품과 서비스의 개발과정에서 장애인이나 노인과 같이 우리 주변의 소외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한 번 쯤 생각해보는 것은 꼭 필요한 과정이다.

'시각장애인이 우리가 만든 제품을 쓸 때 어떤 어려움이 있을까?'

'노인 사용자가 우리 제품을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을까?'

'시각장애인이 우리가 제공한 대체 텍스트를 스크린리더의 목소리를 통해 접했을 때 이미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들이 모여 제품이 개발된다면 모두가 쓰기 편한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접근성을 준수한다는 것 모든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 가능한 제품 혹은 서비스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접근성 분야에서 일하며 내가 느낀 것은 처음부터 접근성을 준수하고 제품을 개발하는 것과는 달리, 이미 개발된 제품에 접근성을 향상시키는 것은 몇 배의 노력과 시간이 더 필요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듯 장애인, 노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가 진정으로 건강한 서비스라는 이야기를 전하며 여기서 이만 부족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글은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의 당사자 목소리 공유 프로젝트 '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들' 일환으로, 접근성, ICT분야, 스마트폰에 전문성과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재단법인) 행복ICT에서 근무중인 김동현 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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