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C에 미국 전역에서 온 25만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군중들 앞에서 한 흑인 목사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I have a dream!”

이 연설은 6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가슴을 뛰게 만든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특별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단지 흑인이 피부색으로 차별받지 않는, 그런 사회를 그는 이야기한 것이다.

나 역시 이 연설의 내용처럼 특별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읽고 싶은 대학 교재를 마음껏 읽고, 가고 싶은 곳에 언제든지 가며, 안내견과 함께 다닌다는 이유로 대중교통이나, 식당에서 거부 당하지 않을 권리, 그런 기본적인 권리를 원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본적인 권리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아직 사치인 듯하다.

나는 2003년 시력을 잃었다. 그 전까지는 밖에서 뛰어놀며 해 저물 때까지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던 아이였다. 그 누구보다도 평범하고 밝았던 아이는 하루 아침에 사회로부터 ‘장애인’이라는 낙인을 얻게 되었고 그 낙인이 만들어낸 프레임에 갇혀 살게 되었다. 그 프레임은 마치 쇠사슬처럼 언제나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일상’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면 그 그림 속 모델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만큼 평범하고 보통의 일상을 살던 한 아이에게, 시력을 잃고 난 후의 세상은 너무나 다른 곳이 되어 버렸다. 세상의 무서움을 모르던 아이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몸소 느끼기 시작하였고, 세상을 아름답다 여기던 아이는 점점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렇게 특수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나로서는 다른 세상, 다른 장소에 대한 기대와, 동시에 그곳에서 다시 내가 얻게 될 또 다른 낙인과 상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하면서 들어간 대학 생활에서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도움이 필요한 것이나 대학 생활에 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라며 내 긴장을 풀어주던 선배들부터, 먼저 다가와서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인사를 건네던 동기들, 그리고 흰 지팡이를 혼자 짚고 갈 떄 먼저 와서 정중히 도움이 필요한지를 물어보고 흔쾌히 자신들의 팔을 내밀던 이름 모를 수많은 학생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시절 닫아버린 내 마음 하나 열어보겠다고 자신들의 속마음을 먼저 털어놓고 같이 술 한 잔 하자며 학교 앞 어느 술집으로 나를 잡아끌던 많은 동기들 이 좋은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열게 하였다.

언제나 소극적이었던 내가, 조금식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서서히 속마음도 내보일 수 있게 된 것은, 그리고 언제나 어두웠던 내가 이만큼이나마 밝아진 것은 그 프레임이라는 것을 씌우지 않고 마치 오래 알던 친구처럼 먼저 다가와서 손 내밀던 소중한 인연들 덕분이다.

당연히 대학 생활을 하면서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와 같은 다수가 너희와 같은 소수를 위해 왜 세금을 내야 하냐고 묻던 사람, 눈도 안 보이는데 밖에 왜 나와서 돌아다니냐고 하던 사람, 장애인이라서 부담스럽고 짐이 된다던 사람, 너가 눈이 안보이게 된 이유는 조상님이 큰 잘못을 저질러서라며 내가 흰 지팡이 짚고 걸어가는 내내 쫓아오며 말하던 사람까지 참 많은 이야기를 들은 듯하다.

하지만 그냥 웃어넘길 수 없을 이야기들을 들으면서도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소중한 인연들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사람들과 소통하는 이유는 장애인이라는 존재를 잘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다른 것 없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단 한 사람에게라도 알리고 싶어서이다.

지금 내 왼쪽 눈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원래 나의 오른쪽 눈은 처음 시력을 잃었을 때, 이미 빛조차 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왼쪽 눈은 색깔과 앞에 있는 물체의 형태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왼쪽 눈 역시 점점 빛을 잃어갈 것이라고 말했고, 현재 내 왼쪽 눈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햇빛 정도가 전부이다. 물론 언젠가는 이 빛조차 보지 못하는 날이 다가오고,그래서 한 번씩 조금 씁쓸한 기분도 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까지 슬프게 느끼지 않는 이유는 남은 시력마저 잃어도 ‘시각장애인 최가준’이 아니라 친한 친구 ‘최가준’으로 나에게 빛이 되어줄 사람들이 옆에 있어서이다.

나 역시 꿈이 있다. 그것은 그저 평범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나의 장애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시각장애인들의 기본적인 권리가 사치가 아니라 말 그대로 권리가 되길 바란다.

한 사람의 힘은 그리 크지 않다. 그렇지만 앞에 나서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 그 뒤에서 그 사람을 지지해 주고 응원하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사람, 그리고 어떤 특별한 무언가는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힘들이 모이면 이 세상이 조금은 변하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낙인에 상처받아하고, 매사에 긍정적이거나, 세상을 아름답다 말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 같이 작고 약한 사람도, 작은 목소리 밖에는 내지 못하는 이런 사람도 이 세상에서 아주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믿어 보려고 한다. 나도 한번 말해보려 한다.

“I have a dream!”

*이 글은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의 당사자 목소리 공유 프로젝트 '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들' 일환으로, 경희대학교에 재학 중인 최가준 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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