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의회 이상호 의원.ⓒ에이블뉴스DB

4년의 시간이 훌쩍 세월을 넘어섰습니다.

깜냥도 되지 않는 건달이 분에 넘치는 권력 안에서 의정 활동이 아닌 거의 지랄 수준의 저항을 했습니다.

돌아보니 정말 한심할 정도로 한 것이 없습니다. 개인의 시간이었든 역사의 시간이었든 4년은 분에 넘치는 권력과 힘들었던 시간의 공존이기도 했습니다.

동네에서 건달의 모양새로 장애인권 어쩌구 저쩌구 했던 것이 다였던 건달이 한국사회 정치의 심장부에서 거의 실시간으로 현장을 목도하고, 주요 정치적 길목들을 요리 조리 피해(?)가면서 장애의제만을 확산시키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제였습니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주고받는 것인데 저는 주는 것은 없고, 얄미우리만큼 챙기기만 한 듯합니다.

현장에서는 마치 저 혼자의 존엄인 듯 게거품을 물었던 이가 때로는 영혼을 팔아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정치인 자신의 부고만 아니라면 어떤 형태이든 이슈의 중심에 서기 위해 일부러라도 다녀야 했던 많은 행사들을 욕을 먹을 만큼 다니지 않았습니다.

밥과 술을 도와 정치적 인연들을 확장시키기 위한 많은 자리들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국민들은 정치인의 말을, 특히 거의 지시나 명령조에 다름없는 축사의 탈을 쓴 말들을 싫어합니다.

우매한 백성 앞에 현자의 모양새를 한 정치인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더구나 권력의 반비례에서 마이크의 우선순위를 장악하려는 모양새는 한심함과 정치인이 국민의 대표임을 치욕스러워 하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현장에 있을 때 이런 경우를 많이도 보았으니 저 스스로 재수 없음에 갇힐 연유가 없었습니다.

밥과 술을 도와 인연을 확장해 나가는 일 또한 저의 겁 많음으로 애써 피해 다녔습니다.

비극과 맞닿아 있는 장애의제의 우선순위는 장애운동의 언저리에서 충분히 경험했으니 그 비극의 우선순위를 놓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그 수많은 민원 앞에서 중심을 잃고 정치적 양아치의 모양새가 될 까하는 공포이었습니다.

썩어도 준치라고 장애 계에서 만들어 주신 선수인데 최소한 양아치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나 좀 더 많은 분들을 모시지 못했고, 선배님들의 자문과 고언을 구하지 못한 싸가지 없음에 대해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죄드립니다.

행사 참석 한 건에 이동까지 포함하면 대략 3시간이 소요되니 그 시간에 서울시와 면담 한 건이라도 더해서 얼마간의 예산이라도 확보 할 수 있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과 다수의 행사참석이 자칫 정치인의 자랑 질 or 재수 없음으로 비칠까 하여 피해 다녔습니다.

허나 오히려 스스로 길을 나서 현장의 생생한 분노와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 실천의 장에 나섰어야 했습니다.

깊이 사죄드립니다.

남성이 여성에 대한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모든 행위는 한 방에 훅 간다는 정설은 이미 정치현장에서 학습되어 있습니다. 의도가 있든 없든 공포 수준에서 지켜야 하는 기준이 된 것입니다.

허나 장애 인권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요? 지켜지는지 아닌지의 문제를 떠나 이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성폭력 예방교육이 한국사회의 모든 공공의 기준을 강제하는 여성 인권의 가늠자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실효적으로 강제되고 있는 것도 그 함량을 떠나 실효성을 보장하고 있다는 것이 대략의 평가인 듯합니다.

한국사회는 관료사회입니까? 그 사실 여부를 떠나 관피아라는 말이 시사용어로 등재 될 만큼 권력의 함량은 꽤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착시의 장에서는 정치가 관료의 갑이라고 보이지만 그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갑, 을의 사실관계를 떠나 전략의 그릇 안에서는 두 가지의 길이 있는 듯합니다. 바로 적대적 관계와 상대적 또는 우호적 동반자 관계입니다.

같은 성과가 있다 하더라도 적대적 관계는 필연적으로 망각을 만나게 됩니다. 정책 행위의 끝자락이 마지못해 밀리는 모양새로 마감되더라도 모시는 형국과 정치적 동반 성장의 길목을 열어야 망각을 피하고 정책의 확장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8대 서울시의회는 One day P.A.S.(일일 장애인활동보조)를 시행했습니다. 이의 결과, 장애정책을 확장시키고자 했던 저항의 길목마다 은혜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큰 조력을 얻었습니다.

나아가 외국의 경우 신입 공무원 교육 시 72시간 P.A.S.를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이 이후 십 년, 이십 년이 지나 고위 공무원이 되었을 때 낙후된 장애정책 패러다임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행정체계에서 선진적인 장애정책과 보다 중증장애인에게 초점을 맞춘 진화의 확장성을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24시간 활동보조의 필요성은 대의와 담론보다는 실증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정론 화된 체험에서 견인 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매년 반복되는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 인간 승리 류의 시상과 수상 or 연예인 공연 후 도시락 나눔 등의 구태에서 벗어나 우리의 의제를 확장시켜나가는 학술제와 당사자 증언대회, 고위 공무원 분들의 One day P.A.S.(일일 활동보조) 등을 통해 장애 인권을 정론화하는 전략이 필요해 보입니다.

인권 침해의 폐해, 방치, 학대의 낡은 틀과 수많은 장애정책의 혼돈을 벗고 관제 행사가 아닌 장애 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대와 정책을 맞이할 영원한 제국의 건설의 근간이 될 것입니다.

정치는 무엇인가? 우리의 일상과 떨어져 있고 사실 별 관심도 없는 명제입니다. 허나 장애운동의 역사를 반추하면 언젠가부터 장애운동의 시작과 끝은 항시적으로 입법화 투쟁을 통하여 이뤄져 왔음을 상기 할 수 있습니다.

입법은 의회에서 하는 것이고 입법적 준거가 없다면 예산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입법적 근거가 있다고 해서 예산이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법안과 조례는 예산의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니 말입니다.

주장을 현실에서 녹아내는 첫 번째 근간으로서 입법이 장애운동의 주요한 축이 된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다만 주류사회에서 영원히 품어내지 못할 저항적 근간으로서 입법운동이 장애운동의 최종적 결과물인지에 대해서는 비판적 or 비관적 판단 또한 있는 것이 사실이고 저도 상당한 양으로서 동의합니다.

제국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민족은 제국과의 일체의 타협 없이 투쟁하는 것이 민족해방운동의 순결성과 완결성을 담보한다는 주장에 적극 동의합니다.

다만 장애의 입장에서 주류사회는 의회민주주의를 인정해야 하는 냉혹한 현실 또한 존재합니다.

주류사회와의 경계선에선 그 또한 또 하나의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비타협적 투쟁의 대상이 아닌 접점과 교류, 협력의 틀 안에 있음도 냉혹한 현실의 장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중운동과 선도투의 접점이 바로 이를 해석하는 틀이 될 것입니다.

단순, 명료하게 정리하면 대략 지형마다 다르기는 하나 인구 백만 당 대략 보수와 진보를 합쳐 사천에서 오천 명 정도의 당원이 주요 정치 인사들을 선출하고 해당 정치인이 관료사회의 인사권을 거머쥐게 됩니다. 서울을 기준으로 하여 자치구 단위 당 이천에서 삼천 정도의 당원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결사력을 보장한 10%는 정치적으로도 실효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것입니다.

대의민주주의의 틀에서 10%의 권력을 찬탈하는 것은 단순히 숫자상에 문제가 아닌 장애 인권이 앞서 말씀드린 정론화의 장을 여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실체적인 권력, 즉 특수하고 대상화된 정책의 발현이 아닌 보편적이고 항시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행정과 정치행위로서 장애정책의 자리매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장애 계는 항상 사즉생(死卽生) 이었습니다. 모든 이슈마다 사즉생이라면 그것이 맞든 틀리든 영원하고 일상적일 수 있느냐는 의문이 있습니다. 사안의 긴급함에서 탈출하면 전선의 무력감과 또 다른 다수의 이슈가 점철되기 때문입니다.

주류사회에서는 장애운동의 절박성과 긴급성을 이해(?)합니다. 허나 매번 들리는 메시지가 목숨을 내놓는 것이라면, 피로 도는 누적 될 것입니다.

이는 장애 계 역시 동일한 듯합니다. 선수 양성은 보이지 않는데 해결해야 할 이슈는 해를 거듭해 차곡차곡 쌓여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담론과 대안이 형성되지 않으면 쇠락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장애운동이 쇠락기이거나 or 조정기라면 이의 난제를 해결해야 할 중앙조직의 장기적인 상과 그에 근간하는 재생산 구조의 건설이 난맥상에 빠졌다면, 정치자원의 활용은 상당기간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듯합니다.

즐겁고 신나는 일상적인 대중운동의 항전지로서 정치자원의 활용이 장애운동의 공간에서 고민되기를 기원합니다.

장애계를 중심으로 한 의제의 합의와 교류, 협력, 실체적인 조직력 등은 서울의 구 단위를 기준으로 할 때 이백의 결사력으로도 충분해 보입니다. 더불어 기간 쌓여왔던 장애운동의 역사와 자산은 그 핵을 휘감으며, 더욱 진화해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가 아닌 정치적 강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착각에 빠져 살아왔습니다. 물론 그 동안의 실수와 실패가 많이도 있어왔고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미완의 과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실패 할 수 있는 권리와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는 책무사이에서 건달로 살아왔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허나 완성까지는 아니어도 똑같은 실수로 반복되는 것은 최소한 폐기하거나 조정하기는 한 듯합니다. 대략 이 십년을 지금까지도 착각 안에 있었다는 것은 제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대단히 멍청한 일입니다.

실로 대단히 멍청한 일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장애 계 비례대표는 장애운동의 자산인 줄 알았습니다. 어리석고 멍청함을 고백하고 사실을 밝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애계 비례대표는 장애운동의 자산이 아닙니다. 심하게 양보하면 장애운동의 각론으로서 목표쯤은 될 듯합니다. 이렇게 되면 장애계 비례대표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도 감내해야 할 자연스러운 현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이제 알았으니 저는 참으로 멍청한 사람입니다. 언젠가부터 장애계 비례대표의 옹립과정이 장애계의 핫 이슈가 되었습니다. 연합공천이 절차적 정당성으로서 장애 계의 자산이 되기도 했고 욕망의 틀 안에서 갈등 또한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폐기할 수 도 없는 노릇입니다. 아니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냉정한 권력의 함수관계입니다. 정치권력을 폐기 할 수 없다면, 아니 더욱 진화시켜야 할 과제이라면, 짚어야 할 핵심은 목표량의 계측입니다.

교육감만큼의 권한도 없는 장애 계 비례대표를 보수, 진보 각 1인으로 한정짓는 것은 애초에 장애정책의 충족성 보다 상징성에 머물고 있음을 주류사회 스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대략 300명의 국회의원이라면 장애계 비례대표가 30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30명이 5명의 동료의원을 설득한다면 150명의 국회 과 반 정족수로 그동안의 장애의제들을 막힘없이 풀어 낼 것입니다. 비과학의 끝자락에서 광기어린 해석이라고 폄하 할 수 있습니다.

허나 여성 운동의 역사를 봅시다. 1990년 대 초 성폭력 특별법 제정 당시 국회 여성의원은 10%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 임금, 고 학력 노동력을 언제든 해고 할 수 있었던 연유에서 출발한 여성의 노동 참여는 그 부정적인 태생을 온 몸으로 저항하며 이제 모든 정치일정에서 30% 이상의 등원 율을 보이고 나아가 한국사회의 모든 판단에서 여성은 권력의 심장부에 올곧게 서 있습니다.

구 단위에서 200명의 당원으로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장애 계를 중심으로 한 절대 권력을 만들 수 있다면 장애운동의 실천 전략에서 충분히 검토할만한 사안입니다.

50여 일간을 아니 지금도 세월호 영령들을 통해 참회와 슬픔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2010지방선거와 그리 다르지 않은 투표율과 여·야간의 패배 없는 전쟁(?)과는 달리 교육감 선거는 그 결과에 대한 이해를 떠나 이제 국민들은 자신의 문제와 특히 아이들의 문제와 직결된 정치일정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수정당을 비롯한 야권은 수성과 재도약이 아닌 거의 재창당 수준의 반전을 꾀하지 않으면 주류 정당이 반세기 이상을 집권하는 일본 정치지형의 모양새가 안착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 여권은 합리적이고 건전한 보수의 구축을 하지 못한다면 국민의 생존을 위협하게 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인권은 각론이 아닌 정론이며, 정론이 위협받는 다면 정권은 언제든 양도해야 한다는 정당 생존의 문제까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10%의 아래로부터의 권력은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우리의 대표로서 10%의 권력은 상층에서 장악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지역과 비례에서 여성의 진출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할 것입니다. 의제의 절박함, 250만 등록 장애인 중에 218만 유권자라는 전후후무한 인구학적 특성은 목표를 성취해야 할 충분한 근간입니다.

다만 정치자원의 활용이라는 과제에서 기간의 자원, 이후의 자원에 대한 활용과 그 목표에 합당한 실체적인 수치의 획득을 위한 경로의 부재는 장애 계의 정치자원 활용이라는 과제에서 상당한 난맥상으로 작용 할 것입니다.

침대만 과학이냐! 폭력도 과학이다! 라는 장애운동의 정서적 농은 그저 농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새로운 출구전략으로서 정치자원의 활용이 장애 계 내부로부터 준비되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몇 가지 고민들을 말 그대로 널어놓습니다.

장애계와 정치자원과의 공식적인 회의체나 연대체, 합의체의 부재입니다.

정치 후보자들이 장애 계의 역사와 정책 우선순위를 학습할 단위의 부재입니다. 주기별로 다가오는 정치일정에 대한 계승과 혁신의 틀 거리가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장애 정책의 상이 정리되고 제안되며, 평가되지 않는다면 그저 간헐적인 이슈로서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전대에 무엇을 했는지 모르니 현재와 후대에 이뤄 갈 상조차 부재 한 것입니다. 또한 장애인당사자주의의 원칙과 가치가 훼손됐는지, 그렇다면 어찌 복원시켜야 할지도 녹록치 않은 숙제입니다.

반 재활, 반 시설이라는 의제가 그저 구호로 끝나고 있지는 않은지, 오히려 장애인당사자주의의 왜곡된 주창으로 오염되고 있지 않은지도 검증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프랑스의 경우 일정 기간 정치적, 정책적 훈련을 제도화해내고 이의 근간에 시민사회운동이 주요한 맥락으로 흐르고 있는 점은 이후 창조해 나가야 할 장애 계의 정치자원 활용이라는 틀에서 시사 하는 바가 크다 할 것입니다.

정치적, 정책적 훈련의 상설화, 장기적인 전략을 위한 전대와 후대, 장애 계와의 교량 등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애 계의 불멸의 짱돌이 준비되지 않는 다면, 이후 장애 계가 득해야 할 정치자원은 일회적이고 단절적인 흐름으로 끝날 공산이 커 보입니다.

가칭 장애정책의정지원센터를 통해 위의 과제들을 상설화하는 지혜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는 그저 연구, 훈련 기관으로서의 자산이 아닌 장애 계의 영원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항구적 진지로서의 역할입니다.

이제 장애의제는 그 중심축을 신체장애에서 정신적 장애로 전이되고 있는 듯 합니다.

정신적 장애운동의 의제의 절박성과 신체장애 중심에 장애운동이 쇠락기 또는 조정기라면 이는 하늘이 점지하신 절묘한 타이밍입니다.

신체장애 중심의 장애운동의 역사와 정신적 장애의제의 절박성, 그리고 애국적인 지원조직이 결합한다면 장애운동의 혁명적인 반전을 내 올 것입니다.

굵직하게 서울시에서 노력한 것을 돌아보면 전반기는 자립생활, 후반기는 정신적 장애의제로 집중하려 했습니다.

여타의 다른 예산과 정책보다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기 보다 그동안의 주류사회가 장애의제에 대해 희소성에 머물렀고 새로운 의제의 향방을 읽지 못했던 것을 훌륭하게 자극(?)했다는 것이 자백입니다.

적어도 장애의제 만큼은 소홀히 다뤘던 적은 없었던 듯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장애운동 현장에서 이뤄지고 있는 부침과 새로운 세대와 의제가 만나고 진화해나가는 절묘한 타이밍에 정신적 장애 의제가 우뚝 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 길에 전투적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한심한 실력 덕에 주 중 일정은 거의 의회에서 보내고 무식함을 덜어내기 위해 주말에는 현자의 만남과 미완의 과제에 대한 숙고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열심히 했다기 보다 그저 끙끙거렸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지치게 되고 아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을 발견하고 지혜를 모으던 중 캠핑을 접하게 됐습니다. 사실 노숙 수준입니다.

불을 피우고 먹을 것을 준비하며, 아들과 한 달을 보내도 못 다한 얘기를 나누는 시간들이 그동안 마주치지 못했던 행복의 시간인 것 같아 참으로 재미가 쏠쏠합니다. 내년 2월에 중학교를 가게 되니 그동안이라도 시원하게 놀아 줄 요량입니다.

의정활동 보고라는 것이 자칫 하면 재수 없는 정치인의 자랑 질이 될 우려가 있어 멈췄던 것을 재창조 할 생각입니다.

장애인의 군대라는 책을 쓸 것입니다. 저의 미력한 경험을 바탕으로 장애인당사자 조직을 초점으로 하여 행정, 정치자원의 활용, 연대, 조직 사업의 원칙과 방향등을 풀어 낼 생각입니다.

결국 모든 조직의 성패는 얼마만큼 강고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가? 에 문제이니 장애 계의 영원한 과제는 장애인의 군대 양성이 될 것입니다.

이 축에서 이후 장애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될 후대에게 보고서 하나쯤은 남기고 죽어야 한다는 미력한 책무의식입니다.

짧은 관찰이지만 장애계 어디를 가든 후대의 기약에 대해 불안정 한 듯합니다. 현재가 아무리 강고한들 미래세대의 기획과 재생산이 없다면 뻘에 머물고 있는 바다가 될 것입니다. 대양으로 나가야 하니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거창하지도 않을 것이며, 미완이 될 것이나 저의 특성상 끊임없이 들이대야 생존을 확인할 수 있으니 시도해 볼 것입니다.

또 다른 봄이 오면 장애 계로 복귀 할 것입니다. 장애계가 만들어 주셨으니 장애계의 자산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좀 더 많은 성과를 내지 못해 송구합니다. 직접 찾아뵙고 자문구하지 못한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받은 은혜는 보은결사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이 사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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