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떠돌아다니던 중 바닷가에 이르러 대화를 주고 받는 부자. 오히려 이런 장면이 결말 장면으로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효자동 이발사 중에서>

‘효자동 이발사’(감독 임찬상)가 잔잔한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가 보다. 일명 ‘마루구스’라는 설사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전기고문을 당하고, 처단당해야 했던 그 시절. 군사정권시절을 서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정치우화는 나름대로 매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각하도 참 오래하십니다”라는 이발사 성한모(송강호 역)의 대사는 아직도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에 실망했다. 바로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심어줄 수 있는 줄거리 때문이다. 최근 MBC 드라마 ‘불새’에서 휠체어생활을 하던 장애여성이 일어나 걷게 되는 줄거리 때문에 원성이 높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도 목발을 짚던 성한모의 아들 성낙안(이재응 역)이 두발로 걷게 되는 참 황당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성한모는 각하의 머리를 잘라주는 전속이발사다. 그는 김민자(문소리 역)를 유혹해 임신시키고, “사사오입이면 헌법도 고치는데, 뱃속에서 아이가 다섯 달을 자랐으면 낳아야 된다”며 아들 낙안이를 낳게 된다. 낙안이는 아버지가 이발사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바가지 머리를 하고 다니는 귀여운 소년으로 자란다.

어느날, 청와대 뒤 북악산에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 침투한다. 이들은 마루구스라는 설사병 때문에 작전에 실패하고 만다. 이 병은 지독한 유행병이라고 한다. 아무튼 군사정권은 이 사건이후 설사병에 걸린 사람은 모두 중앙정보부로 잡아들인다. 현상금까지 걸어 이웃사촌이 서로를 신고하게까지 만든다. 설사병에 걸린 사람을 모두 간첩과 접선한 것으로 몰아 부친다.

이 과정에서 나이 어린 낙안이도 잡혀 들어가게 된다. 낙안이를 포함해 설사병 때문에 잡혀온 이들은 지독한 전기고문을 당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허위자백을 하게 되고, 국내 간첩조직으로 포장돼 처형당하고 만다. 하지만 낙안이는 특이하게도 강한 전기를 받으면 받을수록 웃음이 난다며 혹독한 전기고문을 오히려 즐긴다.

결국 낙안이는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낙안이는 걸을 수 없게 된다. 아버지 성한모는 낙안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한다. 용타는 의원은 모두 찾아다니지만 헛수고다. 그러다가 어느 산골 한의사로부터 걸을 수 있는 비방을 처방받는다.

“용이 죽게 되면 눈깔을 파내 다려서 먹이라”는 허무맹랑한 처방이었다. 그 용은 성한모가 10년이 넘도록 머리를 깎은 대통령을 빗대 표현한 것이었다. 성한모는 그 한의사의 처방대로 행하게 되고, 결국 이미 청년으로 성장한 낙안이는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설정은 지독한 부성애를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였던 것 같다. 사실 이 영화는 정치우화라기보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다룬 영화에 더 가깝다. 그래서 작가는 개연성도 작위성도 따지지 않고 낙안이를 혼자서 걷을 수 있도록 만들어냈다. 그것은 그 상황에서 부성애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가치였으며, 작가가 아버지에게 부여한 지상과제였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에서 공주(문소리 역)와 종두(설경구 역)가 사랑을 나눠가는 부분에서 공주가 상상을 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상상 속에서 공주는 장애가 없는 사람으로 변해 종두와 아름다운 사랑을 나눈다. 이를 두고 장애인들은 “비장애인의 시각으로 장애인의 생각을 헛짚고 있다”고 비판했다.

‘효자동 이발사’는 ‘오아시스’보다 좀더 나아가서 현실 세계에서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장애는 불행이고, 비장애는 행복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결국 감독은 해피엔딩을 위해서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만드는 신화를 창조해냈다. 굉장한 판타지다.

그렇다면 낙안이를 걷게 하지 않고는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을 도출해 낼 수 없었을까? 우리 사회는 박정희 정권을 보내고, 전두환 정권을 맞았지만 영화가 암시하는 것처럼 커다란 행복은 찾아오지 않았다. 주인만 바뀐 같은 군사정권이었을 뿐이었다.

이 영화가 진정한 정치우화를 꿈꾸었다면 무리하게 해피엔딩을 낼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완성을 꿈꾸었다고 해도 낙안이를 굳이 일어서게 할 필요가 없었다. 아들을 일어서게 돼 아버지의 죄책감이 가셨을지는 몰라도(낙안이가 잡혀가게 된 것은 아버지가 실수로 인한 부분이 크다), 이 장면을 본 관객들과 장애인들의 가슴에는 황당함이 채워졌을 것이다.

단언하건데 걸을 수 없는 장애인들은 언젠가 걷게 되는 날만을 꿈꾸며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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