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1일 풀뿌리 민주주의 기초인 지방자치 선거가 이루어진다. 정치를 보면서 혐오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여전히 정치는 우리의 화두(話頭)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는 사회의 기본질서를 만드는 원천이 정치에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 올바르게 되어야 바른 사회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승만-노태우까지 이어지는 독재정치와 반민주주의는 범민주화세력의 희생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분명한 것은 독재정치, 군사정치는 끝났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민주주의가 도래했는가? 이 질문에 “Yes”라고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어쩌면 민주주의(民主主義)라 일컫는 것은 이념(Ideology)이기에 하나의 이상(理想)에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민주주의 실상을 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이상적인 인간상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Impossibility)하여도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것이 역사가 아닌가? 그리고 우리의 삶이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여전히 민주주의는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이고, 우리가 전진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동반자이다.

그러면 문민정부-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르는 정치현실을 살펴보자. 더욱 극심화된 지방정치의 양극화는 우리의 현실이다. 특정지역에서 특정 정당 출신만이 당선된다. 이러한 정치현실이 이루어지는 것이 올바르지 않으면서 이러한 정치현실은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곧장 지방을 분리시키는 도식을 사용한다. 민주와 반민주(民主와 反民主). 특정지역 사람은 민주주의 세력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반민주세력인가? 물론 피해자와 가해자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사회주의 보다는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공산주의 보다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어쨌든 오늘의 정치현실은 정당-지역이 맞물려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는 국민이 만들어 놓았다.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국민이 그렇게 조성했다. 한 번, 두 번은 그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현실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는 것도 역시 국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민(國民)"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기초가 국민 한사람 한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투표를 하는 국민 스스로가 만든 정치 현실에 대하여 비난하고 비방하는 것은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비난, 비방하기 전에 국민이 먼저 올바른 정치현실과 정치구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는 지방선거에도 정당의 추천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다보니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사람 역시 정당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특정 지역에서 특정정당의 공천을 받는 것은 곧 당선이라는 도식이 효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국민이 만든 것은 아니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당의 입맛에 맞게 만든 것이다. 중앙정치와 지방정치까지 좌지우지 하려는 의도가 이대로 표현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의 정치 수에 말려들어가야 하겠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정치 구조, 중앙당이 공천의 힘을 발휘하는 - 물론 경선 제도를 도입하기는 했지만 -이 현실을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는 민주주의(民主主義)가 아니라 당주주의(黨主主義)이기 때문이다. 정치하는 사람이 국민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정당의 눈치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천 받은 사람도 국민보다는 정당에 대한 헌신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대의정치(代議政治)이고, 대의정치가 정당 중심의 정치(政黨中心의 政治)라 할지라고, 이는 국민의 눈을 두려워하는 의식에 기초해야 한다. 그러나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옷을 형식으로 걸쳐 입은 당주주의에 불과하다.

당주주의 정치는 정책중심의 정치가 될 수 없다. 정책이나 인물보다는 정당이 우선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당이 특정지역과 맞물려 있는 현실은 정책정치를 불가능하게 한다. 인물과 정책을 중시하는 정치를 실종시킨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는 부패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정치현실을 국민이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종종 지방에서 특강을 하는 기회를 갖는다. 그때마다 이렇게 말하고 한다. "장애 문제에 관심을 갖는 우리가 정치세력화를 만들어서 결정적인 역할(Casting Vote)을 하도록 합시다!" 이렇게 말하면 한숨쉬는 탄식이 여기저기 흘러나온다. "이 지역에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당에 속해있느냐가 중요할 뿐이지요."

그렇다. 여전히 지역과 결탁된 정당이 중심이 되는 한, 민주주의는 요원(遼遠)하다. 그러나 이를 개선하여야 한다. 국민의 힘으로.

국회에서는 교차투표(Cross voting)를 권장하고 있다. 즉 정책이 중심이 되고 당론이 중심이 되지 않는 투표를 하자고 한다. 그러나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념적 태생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필자는 이러한 교차투표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국민에 의해 이루어지면 어떨까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특정지역에서 당연히 당선되리라는 정당보다는 반대당(反對黨)을 적극 지원해서 지역-당이라는 구조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지역에서 공천만 받으면 자동으로 당선되리라는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해본다.

종종 미국정치를 살펴본다. 죽었다 깨어나도 민주당 지지자, 공화당 지지자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이 일부는 지역에 기초하지만,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다. 그들이 40:40으로 분할되어 있는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 보다 더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있다. 그들이 마이너리티(Minority)이다. 즉 소수세력이다. 장애인, 농민, 이민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이 관철되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정당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협상을 한다. 정당은 이러한 소수세력을 외면할 수 없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의 주장을 정책으로 반영하도록 애를 쓴다. 만일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민주당이나 공화당이 정권을 잡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정치현실을 만들어야 한다. 소수세력들(장애인, 가난한 사람, 어르신 등)의 힘이 현실로 느껴지는 정치현실을 조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장애인과 이와 관계된 사람이 힘을 합쳐서 특정지역-정당의 구조에 의해서 당락이 결정되는 정치현실이 아니라 장애인과 가족, 그리고 장애인 분야의 전문가, 자원봉사세력에 의하여 당락이 결정되는 정치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하인스 워드가 미국에서 MVP를 받았다고 하여 쉽게 혼혈인의 차별을 금지하자는 법을 발빠르게 상정하는 국회를 보면서 우리가 그토록 투쟁하면서 준비해 온 장애인 차별 금지법에 대해서는 어찌도 그다지 느리게 움직이는지... 이러한 모습이 바로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장애인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차별금지에서 포퓰리즘(Populism)이 통하는 현실을 우리로 하여금 비애를 느끼게 한다. 장애인의 권리와 주권이 우선적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민주주의가 앞당겨진다.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세력,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은가?

[리플합시다]장애인 일자리 100,000개 과연 가능할까?

[투표합시다]장애인 일자리 100,000개 과연 가능할까?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