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에 이리저리 꽂혀진 책과 책상 위에 널브러진 책을 정리하다가 추억 하나를 발견하였다. 고교시절 백일장에서 입상하여 부상으로 받았던 신경림 시인의 첫 시집 '농무'와 그 책갈피 사이에는 국어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편지 한 통이 끼어 있었다.
오래된 편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편지지의 빛바랜 냄새보다 진한 향수에 젖어 단발머리 고교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나무의 마음을 헤아리며 명숙이에게 편지를 쓴단다"라는 말로 편지는 시작되었다.
"내가 네 나이였을 적에 나는 아버지를 따라 산에 나무를 하러가곤 하였단다. 그 시절은 나무를 베서 땔감을 하던 시절이라 나무를 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기도 했지.
아버지는 나무를 베기 전에 늘 나무를 툭툭 톱으로 쳐보곤 하셨단다. 나무에서 나는 소리가 너그러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판단이 되면 나에게 나무를 베게 하셨지. 하지만 나무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이 드시면 "아직 때가 아니야" 하시며 그냥 지나치셨지. 아파하는 나무의 소리가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란 이유였단다.
그것이 아버지의 어린 나무에 대한 배려였던 것을 그땐 알지 못했어. 앞장서서 툭툭 나무를 치며 올라가던 아버지, 혈기만 왕성했던 나는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지. 말도 붙이지 못하고 머리로만 궁금증을 헤아릴 뿐이었단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말씀을 해주셨어.
"나무를 두드려 보는 것은 나무의 소리를 들어 주는 거야. 나무가 아직은 아프다고 하면 베지 않고, 나무가 즐겁게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다면 베는 거지” 라고 하셨지. 나무의 소리를 듣고 나무를 베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되었단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 아니겠니?
아버지의 가르침이 바로 거기 있었다는 것을 어른이 된 후에 깨닫게 되었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먼 훗날에 시인이 될 지도 모르는 너에게 나는 선생님으로서 무엇이든지 그곳에 내재된 마음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라고 부탁하고 싶구나"
근 30여년이 다 된 편지를 읽으며 사람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제멋대로 생활하며 어른이 된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무의 마음에까지 닿아있는 아버지의 마음과 가르침을 애틋하게 간직하고 계신 선생님의 편지가 아직까지도 따스하게 가슴에 새겨졌다. 그리고 지척에 있는 사람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내 삶이 왜소하고 무의미하게 보였다. 점심시간 사무실 옆 공원을 산책하다 나무를 툭툭 나무를 쳐보았다. 하지만 아직 나무의 소리가 내게는 들려오지 않았다. 공원에는 한 움큼의 바람만 웅성거리다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