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에 초등학교에 간 아이

나는 첫 돌을 지나고 소아마비를 앓는 바람에 방 안에서만 기어 다니는 아이였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1960년대였던 그때는 동네 구장이 취학 통지서를 집에 가져다주었다. 여덟 살이던 그때도 나는 방안에서 기어 다니고만 있었다.

“나이는 됐지만 저 몸으로 어떻게.......”

부모님의 한숨과 자탄 속에 내 여덟 살의 봄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해 구장님이 다시 우리 집을 방문했다.

부모님의 한숨과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때는 결코 만만치 않은 내 울음소리까지도 함께 섞여들었다. 나도 오빠나 언니처럼 학교에 가겠다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학교에 갈 수 있을 지는 나도 몰랐다. 그냥 나도 오빠나 언니처럼 똑같은 인간이니까 학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울고 또 울면서 떼를 썼다.

그때 방법을 찾아내신 분은 우리 아버지셨다. 도시에서 목발을 본 기억을 떠올리시고는 우리 동네의 상집을 찾아가셨다. 그 집은 나무를 자르고 문지르고 옻칠을 해서 크고 작은 밥상을 만드는 집이었다. 아버지는 그 아저씨와 의논을 해서 처음으로 목발이라는 것을 만들어다주셨다.

늘 기어 다니던 아이는 그 목발을 잡고 처음으로 일어나보았다. 그러나 너무 어지럽고 겁이 나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는 훨씬 더 낮고 안정감 있어 보이는 마루 끝을 잡고 일어서는 연습을 먼저 해야 했다.

어린 눈에도 기어 다니는 세상과 일어서서 보는 세상은 확연히 다른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어나야만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열 살이 되던 봄에 나는 드디어 학교라는 곳엘 가게 되었다.

-담벼락에 서 있던 아이

나는 아버지의 짐 자전거 뒤에 담요를 깔고 앉아서 학교로 갔다.

머리카락을 날리던 바깥바람은 어찌 그리도 세차고 시원하던지, 가방을 어깨에 메거나 들고서 부지런히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은 얼마나 용감해보이던지 나는 새로운 모습들에 가슴이 뻥 터져버릴 것 같았다.

가슴에는 하얀 손수건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여기에다가 노랗고 파란, 분홍색이고 하늘색의 리본을 달아주었다. 반을 표시하는 색깔인 그 리본 위에는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이걸 달고 아이들은 한달 가까이 운동장 수업을 받았다.

차렷! 열중 쉬어!

옆으로 줄 맞추기

앞뒤로 줄맞추기.

그 자리에 앉기, 서기.

하나 둘 셋! 큰 소리로 외치면서 행진하기.

그렇게 익숙해지면 5,6학년 언니들이 풍금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선생님이 풍금 앞의 의자에 앉아서 발로 패달을 눌러가며 연주를 하면 신입생인 우리들은 율동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아니, 그 자리에 나는 없었으므로 ‘우리’가 아닌 ‘그들’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들이 부지런히 행진을 하고 노래를 하거나 무용을 할 때, 나는 언제나 햇빛 비치는 교실 앞 벽에 기대어 혼자 서 있거나 앉아 있곤 했다. 아무도 나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하루는 내 옆에 함께 서 계시던 엄마가 수업이 마칠 때를 기다려 선생님께 말했다.

“운동장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 들어갈 때가 되먼, 그때 우리 아아는 학교에 오면 안 되겠습니꺼?”

학교에 오느라고 모처럼 고운 한복을 차려 입은 엄마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저기 저 아아 말입니더”

우리 엄마가 교실 바깥벽에 혼자 서 있는 나를 가르킬 때에야 선생님은 아,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마, 그리 하이소!”

너무나 간결하게 떨어지는 선생님의 허락에 우리 엄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래야 했다면, 그때꺼정 정녕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면, 아이를 왜 일주일이 넘도록 혼자서 담벼락에 세워 놓아야 했던 것일까, 억울함과 분노에 찬 한 소리가 가슴을 치고 올라왔지만 엄마는 꿀꺽 삼켜야 했다.

그게 누구의 탓도 아니고 바로 엄마의 죄인 것 같아서였다. 다른 아이들은 멀쩡하게 뛰어갔다가 잘도 뛰어오는데 왜 우리 아이만 이렇듯 불구자가 되어야 했던 것일까. 이것이 모두 죄 많은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엄마의 가슴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계속

(2004에 '현장 특수교육' 9,10월호에 실었던 원고입니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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