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아동을 돌보는 일을 하다보면 많은 상념에 잠기게 된다. 시중에서 회자되는 용어들과 장애아동과 그 가족의 삶. 과연 회자되고 검증된 결과라고 주장되는 것 만큼 장애아동과 가족의 삶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뉴스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조기교육이 과연 효과적인가? 그렇지 않다."는 보도였다. 과연 그러한가? 중요한 것은 조기교육 그 자체가 아니다. 누가 어디서 어떠한 방식으로 조기교육을 실시했는가이다. 결국 사람의 문제이다. "사람"의 문제를 논하지 않고, 조기교육의 과오를 논하는 것 그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많다는 사실이다.

장애아동의 조기개입/조기재활 역시 동일한 문제이다.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놀이치료, 심리치료, 언어치료, 행동치료, 감각통합치료, 향기치료, 음악치료, 미술치료, 감각운동치료 등에 몰입하고 있는가? 게다가 개별치료,그룹치료, 나아가 통합교육에 이르기까지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어머니들을 혼란에 빠트리게 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장애인 부모회의 중역인 한 분은 "치료적인 서비스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강변한다.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조기교육 열풍에 시달리고 있다. 30분 밖에 수용할 수 없는 어린아이에게 3시간 서비스를 제공하는 어머니가 대다수이다. 30리터 밖에 안되는 그릇에 300리터의 물을 붓는 격이다. 문제는 30리터 밖에 안되는 그릇 조차 텅텅빈 그릇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서비스의 양이 올바른 사람에 의해서 제공될 때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이는 일반아동이나 장애아동이나 기준은 동일하다. 안타까운 것은 이와는 정반대의 노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분리될 수 없고,분리할 수 없는 내용의 서비스를 "전문"이라는 이름으로 분리하여 제공하는 우(愚)를 범하는 현장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놀이치료와 언어치료를 분리하는 것, 음악치료와 심리치료를 분리하는 것, 감각통합치료, 언어치료, 미술치료, 그리고 놀리치료를 별개의 영역으로 분리하여 접근하는 것이 그것이다. 놀이치료를 할 때 언어치료를 병행되어서는 안되는가? 음악치료는 심리치료와 별개의 영역인가? 음악치료와 언어치료는 별개의 영역인가? 심리치료는 독립적인 영역에서 다른 영역과 무관하게 전개될 수 있는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서비스를 주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어떠한 과정의 수련을 거쳐서 무슨 자격증을 누구에게 받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일년에 두차례 실시되는 어떤 "치료사 자격증을 주기 위한" 세미나는 인산인해이다. 동일한 강의실에서 1000명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 강의가 제공된다. 이렇게 해서 제공되는 자격증이 3급 혹은 2급이다. 과연 이러한 세미나 과정이 적정한 것인가?

한 강의실에서 30-40명과 함께 훈련받는 대학원 강의실에서 시행되는 과정 조차도 30-40명 전체에게 효과적인 내용을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1000명에게 제공되는 세미나, 그 실체는 무엇인가?

이렇게 양성된 사람들이 소위 자격을 가진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기관에서 나름대로(?)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고민하면서... 그러나 살아가기 위해.... 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과연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부모들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으면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에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과 기관은 너무도 많다. 여기에서 배출되는 사람 역시 많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인정받는 자격증은 물리치료사와 작업치료교사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는 분리된 영역에서 분리된 차원으로 분리된 서비스가 제공된다. 이러한 서비스에 이끌려 힘들게 고생하는 사람은 장애아동과 그 가족이다. 이들은 이렇게 시달리다 결국은 자포자기하고 만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다시금 어머니 몫, 아버지 몫으로 돌아오고 만다. 전문가도 없고, 팀 접근도 없는 우리의 현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체계에 매달려야만 하는 가족들. 믿을 것이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쫓아다닌 수년간의 세월을 허송하고, 결국은 장애자녀를 둔 부모라는 이름으로 모든 책임을 감내해야 하는 현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세히 살펴 보면 볼수록 "믿음' "신뢰"를 가지기가 힘든 세상이다.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사람들도 장애인보다는 양성체계와 양성주체의 운영에 더 관심이 많다. 여전히 장애인을 환자로 몰아가는 현실에서 장애를 치료하여 일반아동을 만들려는 허상은 줄어들 수 없다. 이러한 차원에서 신뢰했던 현실은 불신과 절망의 결과를 얻을 수 밖에 없다. 결국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진정한 전문가는 참다운 팀 접근을 이루어낸다. 그러나 돌팔이들은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팀접근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무능력이 드러날까봐. 이제 다시금 학자적인 양심, 장애인을 먼저 생각하는 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장애자녀를 가진 부모들도 자녀의 장애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장애 자녀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시작이 존재하게 된다.

나 자신 부터 장애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장애를 거부하는데, 과연 누가 장애를 긍적으로 생각하고, 장애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 부터 내 자녀의 장애를 인정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데, 과연 누가 나의 장애자녀를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한 노력이 장애 없는 나의 자녀를 만들 수 있다면 좋다. 그러나 마음에는 장애자녀가 없지만, 내 품에는 장애자녀가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품 안에 있는 자녀를 사랑하는 일이 먼저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래야만 "장애인과 함께 사는 아름다운 사회, 장애인과 더불어 존재하는 정상적인 사회"가 존재한다. 장애를 병으로 생각하고 치료하려고만 하는 사회에는 장애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비정상적인 사회만이 존재할 뿐이다."

참으로 서로 믿고,서로 신뢰하고, 서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솔직하려는 용기, 장애를 인정하고 참다운 출발하려는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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