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정상에서 바라본 새해 첫 일출. <칼럼니스트 박종태>

먼저 장애인 여러분들과 장애인을 사랑하시는 모든 분께 세배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2005년은 장애인들에게 기쁨과 즐거움만 가득한 한해가 됐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2005년을 어떻게 출발할까 생각하다가 민족의 정기를 간직한 영산 백두산에 가서 장애인들이 가장 바라는 2005년도 소망을 담아서 기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에 빠져 있던 중 마침 백두산 천지 기상관측소에서 31일 밤 숙박을 하고 1월 1일에 일출을 볼 수 있는 여행 상품이 나와서 신청하고 준비했습니다.

떠나기 전 장애인들의 소망이 담긴 플래카드를 만들었습니다. 플래카드에는 총 19가지 소망이 담겨졌습니다. 에이블뉴스에서 키워드 설문조사 내용 등을 반영하고, 장애인분들에게 2005년 바람을 문의해 정한 것입니다.

30일 오전 12시20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해 장춘을 거쳐서 연길에 도착, 하루 숙박을 하고 다음날 용정이라는 곳에서 관광을 하고 이도백하를 거쳐서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앞은 눈을 치울 수 있도록 불도저처럼 생기고 바퀴는 탱크처럼 생긴 설상차(눈 위를 달리는 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이 차를 타고 천문봉(2670M)에 도착하자 일행 40여명이 일몰을 보기 위해서 백두산 정상을 급히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일행을 따라 나도 정상 150미터 전까지 올라갔으나 너무 힘이 들어서 다시 관측소로 내려왔습니다.

3년 전 가을에 백두산을 다녀간 적이 있었지만 너무 힘들이 들어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뒤에 처져서 고생을 하니 중국 가이드가 모자를 씌워 주고 목도리를 둘러 주었습니다. 너무 고마웠습니다. 겨우 걸어서 천지 기상관측소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관측소는 2층으로 방이 7개 정도 되지만 전기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 판넬로 방을 데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설이 너무 열악해서 추웠습니다.

밤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폭죽놀이도 했습니다. 나는 너무 추워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론 방송에서 백두산 일출 취재차 많이 와 있었습니다. KBS 뉴스팀, KBS 프로그램팀, MBC 프로그램팀, 한겨레신문사 등. 나는 당당히 에이블뉴스에서 장애인들의 소망을 담아 백두산에 왔다고 했습니다.

영하 40도라는 추위가 정말 너무 걱정이 됐습니다. 옷차림도 허술하고 장갑도 지하철에서 산 500원짜리였습니다. 두 켤레 등산화는 다행히 백두산 오르기 전에 아이젠 달려있는 것을 한국 돈 3천원 주고 빌려 신어서 다행이었습니다.

플래카드에 담아 백두산 정상에서 외친 19가지 소망. <칼럼니스트 박종태>

다음날 5시30분에 기상해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6시30분 일출을 보기 위해서 출발했습니다. 천지로 오르는 200미터가 너무 춥고 가파르게 보였습니다. 정말 일출이고 뭐고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장애인들을 생각하고 얼어 죽을 각오로 마음을 독하게 먹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콧물, 눈물이 범벅이 되어 겨우겨우 한발자국씩 옮겨서 백두산 정상에 도착하니 손과 얼굴이 얼어서 떨어져 나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손을 녹이고 있는데 ‘와~!’하는 함성이 들려서 얼른 반사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렀습니다. 아주 맑은 하늘에 새해 첫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며 장애인들과 소외당한 모든 사람이 잘사는 2005년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19가지 장애인 소원을 읽으며 소리를 지르니 KBS 기자가 옆에서 촬영을 했습니다. 나중에 돌아와서 보니 1월1일 KBS 9시뉴스에 보도가 되었는데 얼굴이 옷에 파묻혀서 잘 알아볼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백두산 정상에서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외치면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중국 공안이 플래카드를 가로채서 가져갔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도 아닌 장애인문제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답답했습니다.

정말 새해 첫 일출은 너무 장관이었습니다. 눈보라도 없어 그나마 날씨도 괜찮은 상태였습니다. 한 15명 정도는 천지를 횡단해 장백폭포로 내려간다고 출발했습니다. 나도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포기하고 내려와서 백두산 온천물로 목욕을 하면서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시커멓게 동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편안하고 즐거웠습니다.

백두산을 내려와 연길까지 3시간 30분을 달려서 연길 북한식당에서 공연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빨리 통일 하자는 인사를 남기고 이곳을 떠나 중국 국내선을 타고 심양(봉천)에 가서 숙박을 했습니다. 다음날 6시 식사를 하고 9시30분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인천공항을 거쳐서 돌아왔습니다.

고생은 많았지만 보람이 있던 여행이었습니다. 백두산 고생을 생각하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2005년은 견딜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장에서 발로 열심히 뛰겠습니다. 늘 감사드리면서 열심히 발로 뛰면서 장애인 주인공이 빛나도록 스턴트맨, 엑스트라 역할을 충실히 하겠습니다. 실망을 시키는 없도록 불철주야 노력하겠습니다.

백두산에서 한 많은 생각 중의 하나는 장애인 용품을 만드는 회사가 눈가림하고 장애인들의 안전을 생각지 않고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장난을 치는 업체는 뿌리를 뽑고 장애인들 의 불편을 해소하고 안전을 생각하는 업체는 장애인들 스스로가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005년에는 에이블뉴스를 통해 국민들의 혈세를 낭비하고 장애인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는 법규를 개정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없는 법규는 제정을 하도록 더욱더 노력하겠으니 지켜보아주시고 힘을 주십시오. 장애인들이 바라는 소망 19가지를 담은 플래카드(공안에게 뺏겨 새로 만들었습니다)는 제 기도 방에 걸어놓고 기도할 것입니다. 꼭 이뤄지도록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것입니다.

*관련 사진은 포토뉴스에 올려져 있습니다. 사진 보러가기

박종태(45)씨는 일명 '장애인 권익 지킴이'로 알려져 있다. 박씨는 고아로 열네살 때까지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 자랐다. 그 이후 천주교직업훈련소에서 생활하던 중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고, 92년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이 눌려 지체2급의 장애인이 됐다. 천주교 직업훈련소의 도움을 받아 직업훈련을 받고 15년정도 직장을 다니다 자신이 받은 도움을 세상에 되돌려줄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가 92년부터 '장애인 문제 해결사' 역할을 해왔다. 97년 경남 함안군의 복지시설 '로사의 집' 건립에서 부터 불합리하게 운영되는 각종 장애인 편의시설 및 법령 등을 개선하는데 앞장서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6월 한국일보 이달의 시민기자상, 2001년 장애인의날 안산시장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해결사'라는 별명이 결코 무색치 않을 정도로 그는 한가지 문제를 잡으면 해결이 될때까지 놓치 않는 장애인문제 해결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