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하고 쾌적한 날, 푸른 초원에 앉아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진다.

호젓하게 홀로 앉아, 혹은 흥겨운 분위기를 타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그 선율에 온몸을 맡기고 흔들흔들 흔들릴 수 있다면 세상에 그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귀가 간지럽도록 소곤소곤 속닥거릴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황홀한 소리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이 아줌마한테는 듣기 좋은 소리가 또 있으니 그 첫 번 째가 아이의 웃음소리이다.

아기들은 예쁜 유리알을 터뜨리듯이 그렇게 까르륵 잘 웃는다.

누워 있는 갓난아이는 만져주기만 해도 웃고, 눈만 마주쳐도 웃고, 뭐라고 쫑알거리는 옹알이에 고개만 끄덕여 주어도 까르륵, 까르륵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다가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하면 후다닥 뛰어와서는 품안에 쓰러지면서 웃고, 개구지게 말썽을 부리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또 씩, 웃는다.

이제 우리 아들은 징그럽게 다 커버려서 그렇게 명랑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지 오래지만, 지금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 웃음소리가 방울 흔들리듯이 내 가슴속에서 청아하게 울리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웃음소리로 아이한테서 모든 선물을 다 받았다.

아이는 커서 부모한테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어린 날, 맑고 투명한 모습으로 이렇게 찰랑 찰랑 웃고 다니면서 온갖 선물을 이미 다 해 주었다.

생명이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여림이 그 여림으로 인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머리를 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믿고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스러움인지를 나는 이렇게 어린 아이를 통해서 배웠다.

그리고 이 아줌마한테 또 한 가지의 듣기 좋은 소리가 있는데, 그건 바로 남편의 노래 소리이다.

우리 남편은 노래를 부를 때면, 자기가 무슨 가수라도 되는 것처럼 분위기를 빡, 잡고 배호나 현철의 노래를 아주 저음으로 깔아서 부른다. 잘 부른다고 감탄을 하지만 생활에서 흥얼거리는 톤이 아니라서 그 노래를 들을 기회는 참으로 드물다.

그런데 아주 가끔, 퇴근해 들어오면서 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있다.

그것도 아주 늦게 퇴근해오는 시간.

배는 고프고 길바닥에서 차는 막히고, 지치고 지쳐서 거의 정신을 잃을 수준이 되면 바보처럼 어떤 노래 가락 하나를 달고 들어온다. 히히힛... 웃음까지 매달고 들어오는 그 때의 표정은 거의 백치 수준이다.

얼마 전이다.

그 날도 몹시 지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눈동자까지 풀려 있는 수준인데도 그의 입에는 노래 한 가락이 달려 있었다.

♪♬ 이름표를 붙여 줘∼ ♪

시간은 아홉시가 훨씬 더 넘어 있었지만 끼니는커녕 간식 한 조각도 먹질 못했단다. 너무 지치기 전에 간단한 요기라도 하고 오라고 나는 늘 주장하지만 이 남자는 마누라가 챙겨주는 밥상만 좋아해서, 아니 좋아한다기보다는 편해서 끝끝내 빈배를 안고 돌아온다.

무거운 짐을 부려놓듯이 쿵, 하고 휠체어에서 떨어져 내려온 그는 화장실로 슬금슬금 기어 들어가 손을 씻고 세수를 하면서도 계속 흥얼거렸다.

♪♬ 내 가슴에 확실한 사랑의 도장을 찍어. 이 세상 끝까지 나만 사랑한다면 확실하게 붙잡아. 놓치면 깨어지는 유리알 같은 사랑은 아픔인 거야. 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주고 이제는 더 이상 남남일순 없잖아. 너만 사랑하는 내 가슴에 이름표를 붙여 줘∼♪

새벽부터 나가서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꼿꼿이 앉아 보낸 그의 하루 일정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러나 그걸 탓하거나 화내지 않고 노래 한 자락으로 넘겨 보내고 있는 그를 보면 내 마음이 아리면서도 한편으론 뜨뜻해진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란 우리 남편의 흥얼흥얼 노래 소리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