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안면장애인의 결혼식을 다녀와서...

안면과 팔,다리에 화상을 입은 아가씨가 25살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랑은 32살의 믿음직스럽고 약간 귀여운 청년이었다.

부유한 가정 속에서도 예의바르고 자기 소신이 있어 보여서 참 마음에 들었다.

신랑 또한 손에 약간 경미하게 화상을 입고 말았다.

예식장 분위기는 다른 예식장과는 사뭇 달랐다.

조용하고 그렇게 분주하지 않았다.

내 얼굴이 신랑측 신부측 가족들에게 노출이 되었을 때 놀래는 기색을 애써

감추려 했음을 난 감지할 수 있었다.

난 신랑 신부랑 함께 사진까지 찍었다.

자기 자식들에 비하면 난 정말 심한 화상 환자였던 것이다.

화상환자들이 아무런 꺼리낌 없이 연애하고 결혼을 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바란다.

그 아가씨가 겪게될 쉽지만은 않을 결혼생활이 부디 행복하길 간절히 바래본다.

나도 한 때 예식장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어색한 순간들 때문에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시선처리가 가장 날

곤혹스럽게 만들었고 꼬마 아이들이 저 아저씨 괴물이라며 점심을

먹고 있는데 날 쪼르르 따라 다니기도 했었으니까.

예식장만 가면 난 갖은 수모와 관심을 한 몸에 다 받고 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다.

나도 과연 결혼할 수 있을까? 항상 이런 명제가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결혼하게 되면 신부측 가족들과 친척들 어떻게 다 감당하며 내가 자식들을

낳는다면 그 자식들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아이들이

아빠의 외모로 인해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할 생각까지 하니 눈 앞이 캄캄하다.

학부모로 아이들 학교에 방문하는 날은 또 어떻고...

엄마가 안면 화상 환자라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자식을 부모 없는 고아 취급을 당하게 할 수 없는 일이고...

이 모든 것들이 내 인생을 절름발이 인생으로 만들어 버렸고 내 삶의 전반을 지배하고

악영향을 미치고 말았던 것이다.

삶이라는 굴레와 속박으로부터 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내 한계를 깨닫고 내 한계를 인정하고 나를 서서히 부서 나가는 작업을 해왔다.

내 안의 의기소침함과 나약함 그리고 자괴감을 깨나가고 확고하고 튼튼한 자신감을

키워나갔다.

어제의 내 모습이 초라하다고 미래 또한 계속 초라하라는 법 결코 없다.

난 예전의 내가 아니다.

난 분명 달라졌다.

난 성공한다. 아니 성공했다.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 절반의 성공이다.

알에서 껍질을 깨고 나오는 못하면 세상 구경을 평생 할 수 없다.

난 껍질을 깨는 아픔을 딛고 절반의 성공을 한 것이다.

이제는 나머지 절반의 성공을 이룰 것이다.

장애가 비록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그게 전부 악영향이 아니라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할 수 있는 영향으로 변환할 것이다.

그리고 아주 너그러운 웃음을 세상을 향해 웃어 보일 것이다.

난 그렇게 약하지도 않고 그렇게 쉽게 세상에 굴복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김광욱씨는 현재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비상근간사로 일하고 있다. 1살때 연탄구덩이에 떨어진 장난감을 주으려다 구덩이에 머리부터 빠지는 바람에 화상장애인이 됐다. 그는 조선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학원강사 등으로 취업을 하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능력때문이 아니라 얼굴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해 정부과천청사앞에서 화상장애인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1인시위에 나서는 등 화상장애인 인권확보를 위해 세상과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그는 또 지난해 5월부터 테스란 이름으로 취업전문 사이트 인크루트에 취업실패기를 연재한 적이 있다. 그 사이트에 올린 180여건의 경험담은 최근 '잃어버린 내 얼굴'이란 제목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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