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어떤 자리에서 승혁이 어머니 임선미씨를 만났다.

정신지체 3급으로 언어와 발달지체를 가진 승혁이를 잘 키워보기 위해서 온갖 마음을 다 쏟고 있는 것을 지면으로나마 알고 있는 터라 너무 반가왔다. 그러면서도 아직 여리고 앳된 모습을 보자, 그녀가 지고 있는 짐이 무거운 것 같아서 한편으론 애처럽기도 했다.

그런데도 임선미씨는 작은 목소리로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장애인 분들께서 힘겹게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면, 저는 너무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 순간 나는, 장애인이 장애인을 만나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너희들이 아느냐? 라고 격앙되어 썼던 지난 날 내 글이 떠올라서 좀 부끄러워졌다.

사실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젊었고 그래서 더 욕심이 있던 지난날에는 내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변함없이 위로가 되어준 것은 별탓 없이 잘 자라고 있는 아들이었다.

꼭 장애가 아니더라도,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둔 엄마들의 애끓는 사정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아오고 있는가?

그걸 볼 때마다 나는 감사할 것뿐, 싶었다.

이 세상의 엄마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아이가 아파서 펄펄 열을 쏟고 있으면, 엄마라는 존재는 자신이 아프다 못해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을.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파줄 수 있다면, 이것이 모든 엄마들의 소망일 것이다.

철없을 때에라도 나는 장애 탓이 엄마한테 있다고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좀 더 씩씩하고 신념에 찬 엄마를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늘 불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내 마음은 이 글 저글에 실려서 온갖 곳에 다 돌아다니고 있다.

말하자면 엄마를 험담하는 불출 딸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회에 변명을 하자면, 이건 엄마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이 사회에 대한 불만의 토로였다. 장애인에 대한 심각한 마이너스적인 인식과 결격된 시선을 가진 이 사회의 풍토를 우리 엄마라고 해서 어찌 비켜날 수 있었겠는가?

그러한 사회적인 인식 때문에 가장 먼저 상처를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엄마였고, 나는 그런 엄마를 통해서 기쁨보다는 슬픔을 먼저 배워야 했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낳고 보니까 엄마의 심정이 너무나 절절해서 눈물이 나는 것이다.

걷지도 못하는 아이, 인간 구실도 못 할 것 같은 어린 자식을 두고,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당신의 가슴이 얼마나 무너져 내렸겠는가.

우리 엄마는 내가 천진하게 자는 모습을 봐도 눈물이 나고, 내가 활짝 웃어도 눈물이 났다고 그랬다. 이쁘면 이쁠수록, 귀하면 귀할수록 더욱더 자식이 처한 처지가 안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게 엄마의 마음이다.

자신이 아픈 것보다 자식이 아파서 더욱 피눈물이 쏟아지는 것이 엄마인 것이다.

그런 중에도 우리 시어머니는 씩씩하셔서 아이 운동회나 야유회에 같이 가면 제일 먼저 며느리 자리부터 잡아놓고 소리치는 분이셨다.

“얘야, 단이 엄마야. 여기 와서 앉아라”

다른 사람이 다 쳐다보도록 용감하게 소리를 치시는 시어머니가 자랑스럽고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늙으신 어머니가 젊은 며느리의 자리를 잡아주어야 하다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 친정어머니는 끝까지 장애라는 것을 부끄러운 조건으로 받아들이신 것 같다.

서울과 인천이라는 대도시에 살던 시어머니와는 달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시골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장애인 딸이 장애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겠다니까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드셔서 결혼당일까지 사위를 보려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게 남편한테 미안해서 친정집이 가까운 부산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태종대에서 전화를 걸었다. 집에 들렀다가 서울로 올라올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대 우리엄마 하신 말씀,

“세상이 니를 우째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멋대로 니 인생을 결정했으니, 끝까지 니 멋대로 살아라. 나는 다른 사람 눈이 부끄러버서 너희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시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중풍으로 한참 고생을 하셨다. 몇 달씩 병원에 계시다가 퇴원을 하실 때면, 우리 집으로 모시겠다고 해도 그걸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셨다. 혼자서 투병해야 되는 그 고독함이 절절하면서도 우리한테는 결코 짐이 되지 않으려고 그러신 것이다.

우리 친정어머니는 얼마 전부터 허리 골다공증이 심해지셔셔 움직이기가 힘드시다. 팔순이 다 되도록 혼자서 꼿꼿하게 생활을 지탱해 오셨지만 막상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 되고보니 마음이 많이 약해지신 것 같다. 다른 형제들보다는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우리 집에 좀 와 계시라고 했더니 그러셨다.

“말을 그렇게 해주이 참말로 고맙다. 그러나 내가 김서방을 싫다라고 내쳤으니 무슨 낯으로 너거 집을 가겠노?”

이 말씀을 듣는데 가슴이 울컥했다.

엄마한테도 그건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장애아동을 둔 엄마들의 쉼터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너무 힘들 때나 지쳐서 더 이상 의욕이 나지 않을 때면 허물없는 친정집에 들리듯 들릴 수 있는 곳. 그래서 아이를 맡겨놓고 자연 속으로 산보도 하고 춤도 추고, 채소와 꽃도 키우고, 기도도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시원하게 온몸 마사지도 받고, 울고 싶은 이는 마음껏 울 수도 있고, 상담도 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회보장제도가 아무리 훌륭해진다고 해도 엄마만큼 훌륭한 제도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온다고 해도 엄마만큼 아이한테 영향력이 큰 인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엄마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런 존재가 지치고 힘들어서 쓰러지도록 내팽개쳐서는 안된다. 그게 복지고 정부에서 할 일이고, 또한 이웃에서 함께 해나가야 할 일이다.

장애아동을 둔 엄마도 우아한 자신의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을 보태어주자. 그래서 엄마의 행복과 기쁨이 자동적으로 아이한테 전해질 수 있도록 먼저 엄마부터 귀하게 대접을 해드리자.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