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말한 것처럼, 장애라는 것을 피해보려고 하던 나는)

고육지책으로 장애에 얽힌 내 정서를 불임여성이나 고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간신히 엮어나가고 있었다.

한번은 <창작과 비평사>에 단편 원고 두 편을 제출했다. 문학계의 유서 깊은 그 출판사에 한번이라도 원고가 실리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그런데 싣겠다고 연락이 온 것이 아닌가.

나는 날아갈 것처럼 신이 났다. 탄탄대로가 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두 편중에서 그들이 고른 원고는 공교롭게도 <눈이 내리네> 였다. 전쟁의 기억으로 인해 아직도 일상에서 공포를 체험해야 하는 실업자 남자의 이야기가 아닌, 장애인 남편을 바라보고 있는 장애여성의 이야기를 썼던 것이 눈이 내리네였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원고를 실을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이 고스라니 드러나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것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내 눈에 묘사된 남편의 모습이었다.

“나는 미끄러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눈이 다져지지 않은 갓길을 택해 발을 옮겼다. 거기에는 불규칙적이고 파행적인 선들이 이리저리 그어져 있다. 선이 처음 시작하는 곳에서는 그나마 약간의 무게가 실린 듯 조금 옴폭하게 파여져 있다가 끝으로 갈수록 그것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나 조금 앞에서 눈은 다시 파이고 떨리듯이 희미하게 그어진 선은 계속하여 지속된다. 이 한 움직임을 위하여 시간이란 것이 얼마나 숨막히도록 천천히 흘러갔을까. 그래도 그것은 꾸준히 앞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아직 발이나 손의 부위로 진화하지 못한 아주 둔탁한 생물이 사력을 다해 온몸을 밀고 간 흔적 같다.

그건 다름아닌 남편의 발자욱이었다. 그는 앞꿈치에만 온몸을 의지하여 발을 끌듯이 걸었다. 나는 희미한 그 선 위에 다시 나의 발자욱을 만들며 그에게로 간다. 작은 발 두 개와 그 양쪽에 동그란 도장을 찍으며.

우리 뒤에 오는 사람이 있어서 이 발자욱을 본다면 이건 도대체 무엇이 만든 흔적이란 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또 다른 원고를 하나 들고 가서 그걸로 바꿔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도 창비사에서는 첫원고가 좋다는 것이다. 웬만한 출판사면 포기라도 하겠지만 그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나는 책이 나올 때쯤 해서 우편함을 지키고 있다가 그 책이 나오자마자 얼른 보자기로 싸서 장롱 밑에다 숨겼다.

나도 내 장애를 누가 흉내 내고 묘사한다면 싫을 텐데, 우리 남편은 무슨 죄로 남도 아닌 사랑하는 아내가, 그것도 장애에다 돋보기를 들여다 댄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까지 공공연하게 확인해야 하는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모질고 잔인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 글이 예상치 않게 호평을 받았고 남편은 싫은 표정은커녕 잘 된 일이라고 너무 기뻐했다.

“아니, 언제 그걸 봤어?”

놀라서 묻는 말에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다 봤지.”

글을 쓰자면 이런 과정을 다 거쳐야 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덧붙여주었다.

아직 신인에 불과한 나한테 갑자기 몇편의 청탁서가 한꺼번에 날아오던 때였다. 나는 물을 만난 물고기 같았다. 그게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장애인의 이야기였는데 그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나한테는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 같았다.

평론계의 거두 김윤식 교수는, 노동계는 노동의 문학이 있고 농민계에는 농민문학이 있었던 것처럼 장애인계에는 장애인 문학이 나올 때가 됐다고 그러셨다. 그러나 지금은 70년대나 80년대가 아니므로 단지 소재만으로 장애인문학 운운할 때는 지나버렸다. 작금의 시대를 다 포괄할 수 있는 깊은 감성과 세련됨을 구비한 장애인 문학이 나와야 된다고 하면서 그 가능성을 나한테 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가슴이 막 떨리기 시작했다.

다음에 두 편의 원고를 한꺼번에 제출하면서 그 중의 자전적이라 할 장애인의 이야기 한 편을 <문학사상>에 실었다. 그전에는 청산가리처럼 장애라는 말을 함부로 꺼내면 죽을까봐 조심조심, 한 자 한 자 새겨 넣었다면 이번에는 내 속에 든 감정을 활달하게 쏟아놓았다. 처음으로 글을 쓰는 일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만큼 나는 고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은 엉뚱한데서 터져버렸다.

새로 나온 그 책을 받기도 전에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중견 소설가 분이셨다.

“그 따위 글을 글이라고 씁니까?”

다짜고짜로 튀어나온 첫말이었다.

“너무나 남사스럽습니다. 문학이 뭐 개인적인 장난입니까? 나는 당신을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 순간 나는 뜨거운 열기에 머리통이 녹아서 흐느적흐느적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손발이 덜덜덜 떨렸다.

소설을 습작할 때는 그 완성도를 높여나가기 위해서 이런 식의 비난을 예사로 받기도 한다. 사실, 일상에 적당히 주질러앉은 주제의식이거나, 그것이 적당한 당의정으로 잘난 척까지 되어 있을 때면 작가들이라는 군상은 절대로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뒤집어져버렸다. 아마 장애를 다룬 글이 아닌 다른 글에서 이런 비난을 받았더라면 앞뒤 상황을 헤아려 자신을 수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문제를 처음으로, 그것도 마음 놓고 전면에 내세운 그 글에 대한 비난은 나한테서 그런 판단력을 마비시켜버렸다. 그건 곧 작품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나 존재에 대한 비난’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흥분한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친한 사람은 문학을 몰랐고 문학을 아는 사람은 나의 장애를 몰랐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 또 그 장애 이야기~ 그런 식으로 머리채를 흔들며 콧방귀를 뀌는 것 같았다.

그때 나한테는 문학이 무슨 성역과 같은 것이어서 그 절대성에 내가 도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그 성역에 이미 도달한 사람이 나한테 아무리 비난을 퍼부어도 그건 성역이니깐 나는 그걸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아! 나는 너무 순진한 것 같애~~~

이제 나는 장애문제를 다시 쓰기가 겁났고, 그렇다고 내 인생을 좌지우지시킨 장애를 빼넣고 다른 데서 갉작거릴 수도 없게 되었다.

글을 통하여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던 통로가 이렇게 막히자

(문학을 통하여 내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싶었던)

나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자기 존재의 소중함, 자기 존엄성, 자신에 대한 깊은 가치가 이렇게 대단한 것이다. 이게 없는 사람은 아주 작은 반격에도 이렇게 무너져버린다.

이른 노화의 증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온갖 뼈마디들이 다 반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쑤셔댔다.

몸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시작한 기(氣)운동과 명상을 하면서 나는 내 속의 나를 보았다. 그것은 수없이 상처받고, 수없이 좌절하고, 수없이 슬퍼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지탱해나갈 수 없도록 쪼그라져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울고 또 울었다. 밤을 새워 소리치면서 울고 더 이상은 나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더 이상 나를 슬프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50킬로이던 몸이 40킬로로 줄었다. 나한테 덕지덕지 붙어 있던 온갖 감정체들이 눈물이 되어 강물처럼 흘러나갔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변하지 않는, 한번도 버려지지 않았던 고귀한 신성(神性)이 태양처럼 우리 속에서 빛을 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다시 알게 될 때까지의 여정이 그토록 길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발견의 기쁨이 너무나 광대해서 막상 돌이켜보는 여정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장애란 참된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선택된 도구와 같은 것이었다. 이처럼 자신을 절박하게 체험할 만한 가장 깊은 굴레가 이것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이 굴레에서 자유로워진다면 더 이상 겁날 일이 없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피를 철철 흘리면서 “아버지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절규했지만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는, “다 이루었다”고 했다.

나도 이 세상과 작별하는 날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살았고, 모든 것을 다 체험했으며, 나한테 온 모든 것을 다 완성시켰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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