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공연관련 일을 하는 남편은 매년 여름휴가를 넉넉하게 받는 편이다. 바쁘게 봄 한 철을 보내고 나면 그나마 여름은 좀 한가한 편이기도 하고, 불편한 몸을 좀 쉬게 해주려는 회사 사장님의 배려가 섞여서이다. 올해는 I.M.F 때보다도 더한 불황이어서 공연이 많이 줄었다고, 아예 지난 주일부터 한 달 동안 넉넉하게 들어앉았다. 남편은 무급휴가라고 걱정을 하지만, 살림 속이 야무지지 못한 나는 우리 남편이 안식년을 맞은 것처럼 기분이 좋기만 하다.

원래 남편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고 나도 그걸 존중했지만 우선 사회적인 경험이 더 필요하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 이면에는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글을 쓰고 싶다라는 욕구가 더 크게 작용을 했고 당시 시어머니 댁에서 돌보고 있는 아이를 데려와야 하는 상황도 더 미룰 수 없도록 급박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표를 내면서 남편한테 그랬다.

"내가 먼저 글로 성공할 테니까, 그땐 당신도 직장 관두고 본격적으로 그림만 그려요."

꿈은 정말 야무졌는데, 그러고 나서 15년이 되도록 내 글은 별반 돈이 되지 못했고 남편은 아침저녁 출퇴근하는 일에 진을 다 뽑고 있다.

그런 형편이고 보니, 고작 한 달 무급이라고 해봐야 나로서는 감지덕지할 뿐이다. 오랜만에 느긋해진 그이는 화구를 꺼내 정리를 하고, 크고 작은 판넬을 세워놓고, 짬짬이 모아온 그림 시디를 몇 시간씩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같이 치과에 가서 정기적인 치료도 받고, 오는 길에 친구랑 만나 외식도 하고 한꺼번에 비디오 테입을 몇 편씩 빌려와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즐거움은 아침에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몸을 푸는 일이다. 나는 늘 해오던 대로 내 침상에서 반 명상, 반 졸음 상태로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다가 책을 보기도 하지만, 그이가 거실에서 음악을 틀고 있으면 그 흥에 이끌려 슬며시 나가 나도 덩달아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나이 마흔이 되면서 마땅하게 운동할 꺼리가 없던 나로서는 한동안 기(氣) 운동을 했었다. 거기에서 배운 것이 음악을 타고 몸이 가는 대로,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몸이 먼저 이완되어야 하지만, 몇 번 익숙해지고 나면 마음만 먹으면 금방 몸이 자기가 필요한대로 몸을 움직일 줄 알게된다. 그러니까 생각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놓아버리고 몸에 집중함으로 몸이 필요한대로 스스로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나는 오른쪽 다리가 더 부실해서 몸을 받쳐주지를 못하기 때문에, 자연히 왼쪽 허리가 온몸을 떠맡느라고 힘들게 경직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오른쪽은 비어서 쪼그라드는 느낌이 있다. 그래서 몸에 집중하기만 하면 쪼그라든 오른쪽이 먼저 펴질려고 애를 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먼저 스트레칭을 해주면 방석으로 받쳐서라도 몸의 중심을 똑바로 잡을 수 있고, 그렇게 일단 정리를 하고나면 나머지 몸까지도 아주 쾌적하게 풀어진다.

일정한 정형이 있을 리 없는 우리 같은 사람으로서는 음악을 타고 자연스럽게 몸이 가는대로 움직여주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운동이 된다. 더욱이 음악은 몸만 흔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더 나아가서는 영혼까지 흔들어주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상쾌함, 때로는 눈물로 흘러내리는 정화작용까지, 말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로 해원의 작용을 훌륭하게 해낸다.

처음에는 그런 나를 뜨악하게 바라보던 남편이 이제는 나보다 더한 애용자가 되어 아침시간 뿐 아니라 시간만 나면 그러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림을 그려야 된다는 중압감에 눌려서 어제 저녁에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렇게 맨날 니나노로 살아도 되는건가?"

가히 니나노파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냉큼 대답을 던졌다.

"그어∼∼∼∼∼럼!!! 맨날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하고…. 그러면서 온몸에 가득 차 있는 매연 덩어리가 얼만데. 그걸 다 쏟아 내버려야 돼."

그러면서 더 아는 척을 했다.

"예술은 쏴아악, 비어버리는 자리에서라야 새롭게 차 오르는 법이거든."

잘난 척 하는 내 말에 우리 남편의 얼굴이 실, 실, 실 피어오른다.

예술이 뭔지는 모르지만, 이건 일상적인 생활과는 확실히 좀 달라서 열심히 하고 싶다고 이빨을 갈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전전긍긍한다고 해서 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나는 이것만은 십오년의 경험으로 이미 확실하게 통달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십오년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나 같은 인간은 정말로 열심히 해야 된다. 아직도 이렇게 비실거리고 있다는 것은, 그 옆에서 깐죽거리기만 했을 뿐, 정말로 열심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것을 체험으로 보여주는 인간이 그만 되고 말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 같은 인간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십 오년을 허덕거려야 했던 울남편 같은 사람은 정말 좀 쉬어주어야 한다, 최대한 재미나게 놀고, 때로는 눈물도 좍좍 뽑아주어야 한다.

오늘 아침에는 혼자만의 명상 같은 건 집어치우고 일찌감치 남편 옆으로 갔다. 내 방을 살짝 들여다보면서 아주 부드럽게, 여보 운동합시다, 그랬기 때문이다. 전에는 스트레칭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들은 척 만 척 콧방귀만 뀌더니 언제부터인가,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겠다고 내 뒤에 자리를 잡기도 한다.

에궁, 이게 무슨 흥감한 일인공!!! 나는 혼자서 샐, 샐, 웃으며 마치 발레리나가 된 것처럼 다리를 휙휙 들어올리면서 유연한 척을 해본다. 킬킬킬….

그러면서 날 보고 있나, 어쩌나, 허리를 돌리면서 얼른 곁눈질로 바라보니까 혼자서 점잖게 눈을 감고 자기 몸 속에 몰입되어 있다. 나는 다시 혼자서 클클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남편의 음악 선곡은 끝내준다. 부드럽게 분위기를 잡아나갈 때와 고조되는 클라이막스를 확실히 알아서 거기에 분명한 정점을 찍어준다. 그리고 팝스와 클래식, 국악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선곡도 항상 기가 막힌다.

오늘 아침의 주제곡은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였다.

나는 이 사람의 감미로움이 오히려 답답하게 여겨져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도, 오늘은 남편과 함께 마음을 열고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자니까, 마치 내가 스페인의 감미로운 무희라도 된 것처럼 몸과 마음이 흐느적거려졌다.

이렇게 세계적인 음악인의 시디라는 것은 그 사운드가 죽여준다. 얼핏 귀로 들을 때는 멜로디나 음성만을 듣고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게 되지만 이처럼 몸으로 들을 때는 앞으로 드러나는 멜로디나 음성보다는 뒤에서 끊임없이 분위기를 만들고 이끌어 가는 사운드가 더 절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싼값에 홀려서 해적판 씨디를 사기도 하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사운드가 조잡하거나 단순해서 몸이 전혀 빠져들지를 않았다.

좋은 예술이란 이런 것이다.

앞으로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그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이 강하게 작용해서 보거나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드러난 부분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쩌면 있는지조차도 까마득히 몰랐던 것까지 드러나게 하고, 흐느끼게 하고, 감동시키는 그런 것이 진짜배기 예술인 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뜻하지 않게 맞는지, 안 맞는지도 모를 예술론까지 들먹여가며, 잘난 척을 하게 되어버렸다. *^.^*

(2003년 6월 23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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